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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대학도서관 효시 존경각, 활을 보관하던 육일각, 제2 과거장 비천당

younghwan 2013. 3. 1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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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유기관으로 오늘날 대학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속건물들을 두고 있다. 성균관 강당 건물인 명륜관 뒷편에는 성균관 소장 장서보관하던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존경각과 유생들이 닦아야 주요 소양 중 하나인 활쏘기에 사용할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육일각이 있다. 또한 명륜당 서쪽에는 명륜당 주변 강학공간을 보완하는 건물로 강당격인 비천당과 일양재, 벽입재 등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일제강점기에 성균관대학 도서관으로 사용되던 비천당만이 남아 있다.

 성균관 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의 효시로 한때 수반권의 장서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존경각은 성종6년(1475)에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이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여 최고 교육기관에 걸맞는 도서를 를 갖추게 하였다. 소장 장서는 주로 사서오경.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관련 서적들이었으며, 불교나 도교 관련 및 기술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초기에는 수만권의 서적을 소장하였으나, 여러차례 전란과 조선후기 교육재정의 부족으로 소장도서가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대출 후 반납하지 않은 서적들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구한말 존경각은 근대교유기관의 도서관으로 변모를 시도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도서를 서울대학교로 강제로 옮겼다고 한다. 존경각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대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아마도 고종대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존경각, 대학도서관의 효시
명륜당 북쪽에 있는 존경각은 성종 6년(1475)에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은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였다. 이후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어 복원한 뒤로 왜란(倭亂)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改修)하였다.기본 장서는 사서오경·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서적 위주였으며, 불교·도가와 기타 잡류의 도서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장서의 분량은 존경각 건립 초기에는 수만 권에 달했으나, 잇단 전란(戰亂)과 재정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었다. 고종 32년(1895)에 성균관 학제변경으로 경학과가 설치됨에 따라 존경각은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으나,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대부분의 도서가 강제로 옮겨지고, 나머지만이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嚆矢)로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약 400여년 동안 유일한 대학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출처:성균관>


성균관 명륜당 뒷편에 있는 도서관이었던 존경각. 수만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영조대에 중건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책의 숫자가 줄어들고 일제 강점기에 서울대학 설립과 동시에 도서가 서울대학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존경각은 건물의 크기가 별로 크지는 않으며, 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 건물의 크기와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는 책이 많았던 것 같으나, 서구식 도서관의 개념은 부족해서 많은 장서를 보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존경각 현판


2009년 존경각

존경각과 나란히 있는 작은 건물은 활과 화살 등을 보관하던 육일각이다. 존경각과 함께 영조대에 건립된 것이다. 유교에서 활쏘기는 여섯가지 중요한 예 중 하나로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여겨졌다. 성균관에 활을 보관하는 육일각을 둔 것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학문과 함께 체력단련을 위해 활쏘기를 권장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육일각(六一閣), 육예의 하나인 대사례(大射禮) 기구를 보관하던곳
영조 19년(1743)에 명륜당 북쪽에 건립되었으며, 성균관 내에 있는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禮·樂·射·御·書·數)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육일각이란 명칭도 육례 중에 하나라는 뜻으로 정해진 것이다. 명륜당 뒤에 육일각을 둔 것은 태학생들에게 글공부와 함께 체력단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으로, 태학생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출처:성균관>


존경각 동쪽편에 있는 작은 건물인 육일각. 이 곳은 유학의 육예 중의 하나인 대사례(大射禮) 기구들인 활과 화살 등을 보관 하는 장소이다.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창고건물이다.


육일각 출입문


2009년 육일각


존경각과 육일각


성균관 사무실이었던 정록청 마당에서 보이는 존경각과 육일각

명륜당 뒷편에 위치한 비천당은 강학공간인 2번째 강당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조선후기 현종대에 건립된 건물로 제2과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이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과거응시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성균관 명륜당 앞 마당의 공간이 부족했기때문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이후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실과 도서관으로 사용되어 왔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88년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비천당 주변에는 일양재와 벽입재라는 건물이 있어서 별도의 강학공간을 형성했었다.

비천당, 2번째 강당
현종(顯宗) 5년(1664)에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남은 재목으로는 서쪽과 남쪽의 일양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중건되었다. 한편, 비천당은 과거시험의 응시자가 많으면 제1 과장(科場)인 명륜당과 함께 제2 과장(科場)으로서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명륜전문학교 설립 후에는 주로 교실과 도서실로 사용되어 오다가 성균관대학이 설립된 이후에 교실 혹은 도서실 등으로 사용되어왔다. 비천당은 니원(尼院 : 즉, 僧房)을 헐어 낸 목재로 건립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말한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라는 말에서 그 명칭이 정해지게 되었다. <출처:성균관>


비천당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로 그 기능은 명륜당과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서후기 과거응시자가 급증하면서, 제2과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평소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비천당은 일제강점기에 성균관대학이 설립된 이후 도서관이나 강의실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비천당 현판. 비천당은 승방을 헐어 낸 목재로 건립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말한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라는 말에서 그 명칭이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제2과거장으로 사용되었던 비천당 앞 마당


성균관 비천당과 성균관대학교


2009년 비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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