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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송산리고분군은 무녕왕릉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백제 고분군으로 공주를 도읍으로 정했던 시기의 백제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경주 왕릉에 비해서 크기도 크지 않고 내부는 중국 남조 귀족들의 무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남조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서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공주의 도읍인 공산성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서방을 죽은자들의 땅이라는 사상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외형적으로는 화려한 면모가 거의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는 무녕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왕릉이 금강변 구릉에 남쪽 방향을 보면서 줄지어 있다.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
송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적석유구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무덤인 적석총처럼 정사각형의 형태로 된 것인데, 제 1단은 폭이 15m, 제2단은 11.4m, 제3단은 6.9m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계단모양을 하고 있는 3단의 적석유구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겉은 고구려 적석총과 비슷하지만 내부는 흙으로 쌓아 올려 차이가 있다. 목관을 놓은 흔적은 없으며, 대신 그 자리에 10cm 두께로 붉은 색의 점토를 깔았다. 아룰러 내부에서는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와 옹관편이 수습되었다. 이 유구는 서울 석촌동 2호분이나 4호분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성시대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가묘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무덤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사시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五銖錢)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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