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전국 사찰

영암 월출산 도갑사, 도선국사의 흔적(?)이 있는 사찰

younghwan 2010. 9. 12. 17:40
반응형


 전남 영암 월출산 자락에 있는 도갑사는 신라말 도참설로 이름을 떨친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 사찰이다. 지금은 중심불전인 대웅전을 크게 세우고, 마당을 넓혀서 큰 사찰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크지 않았던 사찰처럼 보인다. 국보로 지정된 출입문이 해탈문을 보더라도 그 규모가 크지 않고 건축 기법도 뛰어 나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도선국사가 이 사찰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 있고, 도선국사가 영암출신인 까닭에 도선국사와 관련해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은 실제로 조선 세조때 수미대사가 크게 중창하여 그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에는 도선국사 영정을 모신 국사전과 도선국사비로서 국사의 흔적을 남겨 놓고 있다. 전남 서남해안 가까이 우뚝 솟은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계곡이 사찰 전각보다 더 인상적이고, 정겨운 느낌을 주고 있다.



도갑사 해탈문을 들어서면 중심불전인 대웅전이 보이고, 대웅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도갑사 해탈문을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만, 도갑사에는 내력이 오래된 불전은 없고 대부분 최근에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1. 일주문, 들어가는 길


도선국사는 영암출신으로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에 많은 정신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며 전국 각지에 그의 흔적을 남겨 놓고 있으며, 도갑사도 그 중 하나이다. 도갑사 일주문을 지나면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개울물이 있고, 약 50m정도를 걸어가면 도갑사 경내로 들어갈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랜 내력을 말해주는 듯, 고목이 우뚝 서 있다.



도갑사 들어가는 길

2. 도갑사 해탈문 (수리중)



도갑사 해탈문은 사찰의 출입문으로 보통 사찰은 사천왕문이나 금강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이 곳 도갑사는 해탈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도갑사를 찾은 이유 중에 하나가 해탈문을 보기 위해서 였는데 마침 수리중이라서 제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국보급으로 선정된 문화재이지만 유흥준씨가 책에서 혹평했듯이 건축물로서의 가치는 높지 않아 보이는 건물이었다. 이 해탈문을 들어서면 넓은 도갑사 경내가 펼쳐지는데 이 또한 대형 사찰의 경내처럼 넓은데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3. 범종각, 주변 풍경



월출산 도갑사 출입문이 해탈물을 들어서면, 넓은 사찰 마당과 정면의 대웅전이 보이고 대웅전 경내 남쪽편에는 범종, 법고, 목어가 걸려있는 범종각을 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서 세워진 전형적인 범종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의 경우 천왕문 다음에는 강당이 있고, 그 아래쪽에 범종각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이 곳 도갑사는 해탈문을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이 나타난다. 이런 광경은 월출산 남쪽 무위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한국전쟁 이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마당을 넓힌것으로 보인다.

4. 오층석탑, 석조


대웅전 앞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오층석탑이 그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최근까지 탑신만 남아 있다가 하층기단부가 새롭게 발굴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도갑사 오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균형미, 조형미 등이 약간을 떨어져 보이는 느낌이다.


석탑 옆에 있는 석조

5. 중심불전인 대웅전


도갑사 중심불전인 대웅전은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규모가 큰 건물이다. 도갑사 사찰 규모에 맞지 않게 크게 지어져서 전체적으로 약간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 보인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며 화엄사 각황전을 연상시키는 삼국시대 불전이 금당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하고 있다. 무위사 극락전처럼 아담하면서도 기품있게 지어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불전이다.

6. 국사전,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도갑사에는 국사전, 미륵전, 천불전, 명부전, 산신각의 불전이 있으며 그 중 도선국사와 수미왕사의 영정을 모신 국사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산신각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미륵전은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던 자리에 건물을 지어 불전으로 만든 것이다.


도갑사 국사전에 모셔진 도선국사 영정

7.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현대 사찰의 특징 중의 하나로 요사채 건물들이 계속 신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곳 도갑사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중심불전인 대웅전 좌.우로 여러동의 요사채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좌측편에는 강당겸 종무소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고 그 뒷편으로는 수행공간으로서 요사채가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고, 대웅전 우측편에도 새로이 신축한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들이 있다.


8. 도선수미비, 수미왕사비



도선수미비.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조선후기 효종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도선국사와 수미왕시의 행적을 적어놓고 있는 비석으로 글자와 조각의 예술적 가치가 높고 조선후기 조각을 대표하는 유물 중의 하나라고 한다.


도갑사 수미왕사비와 부도전

9. 개울물이 흐르는 도갑사 계곡



도갑사 대웅전을 지나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인 석조여래좌상과 도선.수미비를 보기 위해서 올라가는 길에서 도갑사에서 가장 멋진 장소를 볼 수 있게 된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싶은 욕망이 저절로 생기게 하고 있는 산사의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개울을 건너면 언덕편에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미륵전과 부조전, 도선.수미비를 볼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도선국사실록 道詵國師實錄〉·〈옥룡사도선국사본비명 玉龍寺道詵國師本碑銘〉에 의해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했음을 알 수 있다. 1457년(세조 3) 세조가 신미(信眉) 스님에게 시주하여 수미(守眉)와 함께 중창하기 시작해 1473년(성종 4) 완공했다고 한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작은 당간지주가 계단 양 옆에 있으며 북쪽에 3층석탑, 남쪽에 5층석탑이 있는데 이것은 1928년 이후 어느 때인가 옮겨놓아 쌍탑형식(雙塔形式)을 취한 것이다. 이외에 명부전·미륵전·해탈문(국보 제50호) 등의 건물이 있다. 석불좌상(보물 제89호)과 도선국사비(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와 동자상(보물 제1134호)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도선국사와 수미대사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출처:브리태니커>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사. 성은 김씨. 영암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秘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 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선의 나이 37세 되던 해, 그는 옥룡사에 머물면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당시 제자의 수가 수백 명이라는 점에서 옥룡산문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은 옥룡사에 머문 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에 세수 72세로 입적하였다.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출처:문화원형백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