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함경도를 연결해 주는 3번국도는 옛날부터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많았던 경제적,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길을 통해서 함경도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해산물(건어물)과 북방 만주지역에서 들어오는 교역품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었고, 군사적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한강유역으로 가장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은 한강유역을 쟁취하기 위해서 차지해야 할 중요한 지역이었다. 북한산 동북쪽 지역에는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양주목이 설치되어 이 일대 전체를 다스리는 관리를 두었다.
양주목은 외관직인 정3품 목사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현재 행정구역으로 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와 서울의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도봉구 등을 포함하는 현재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고을이었다. 3번국도변에 있는 양주시청에서 주내방향으로 조금들어가면 4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옛 양주관아가 있었던 양주구읍 지역이 나오는데 작은 시골마을처럼 보이는 이 곳이 경기북부지역 대부분을 다스리던 옛 양주목의 행정중심지이다. 양주목 관아 건물들은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복원된 양주목 동헌 건물과 양주향교만이 남아 있다.
경기북부 지역 행정 중심지였던 양주관아지에는 이 고을의 중요성을 말해 주듯이 많은 양주목사를 거쳐간 많은 고관들의 공덕비가 남아 있다.
양주목 관아지는 옛 객사터가 있었던 유양초등학교부터 동헌이 있는 지역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이 곳을 방문한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를 비롯하여 동헌, 내아,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건물, 창고 등 상당히 많은 관청건물들이 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복원된 양주목 동헌. 양주목사가 집무를 보던 건물인데, 그 건물의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다.
동헌 앞 마당.
동헌 서쪽편에 있는 옛 양주목사 숙소인 내아 건물터.
마당에 한켠에 세워진 이 곳 양주목사를 거쳐간 고관들의 공덕비. 양주목사가 정3품의 높은 관직이라서 그런지 다른 지역의 공덕비에 비해서 비석이 크고 웅장하다.
길 한쪽편에 있는 옛 건물 초석으로 쓰인 석재들.
동헌 뒷편에는 옛날 정조대왕이 양주관아를 방문했을 때 활을 쏘았던을 기념하기 위한 어사대비가 남아 있다.
어사대비
옛 양주관아가 있던 터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왕이 이곳에 들러 활을 쏘았던 일을 기념하고 있다. 조선 정조 16년(1792) 왕은 세조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양주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민정을 살핀 후 근처의 사대(射臺:활을 쏘는 위치의 발사대)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하여 당시 양주목사가 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형태만 겨우 갖춘 거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앞면에는 ‘어사대’라는 글자가 세로로 크게 적혀 있다. 뒷면에 새긴 비문에는 정조가 활을 쏘았던 내용에 이어 왕이 지은 시와 궁궐로 돌아간 후 왕이 내린 말씀을 관아의 오른쪽 벽에 걸어두고 찬양하며, 이 비와 읍지(邑誌)에도 그러한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정조 16년(1792)에 세운 비로, 양주 목사 이민채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출처:문화재청>
이 곳 양주관아지는 중부지방의 탈춤을 일컫는 양주별산대놀이 전습관이 있다.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경기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이다. 이 놀이는 약 200년 전부터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 행사 때에 공연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고을 사람들이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아지자 고을 사람들이 직접 탈을 만들어 놀기 시작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놀이는 전체 8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진하는 길놀이와 관중의 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이 등장하여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등장배역은 모두 32명지만 탈은 함께 사용하는 것이 있어 보통 22개가 활용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라 하겠다. <출처:문화재청>
양주 관아지 동쪽편에 위치한 양주향교. 이 건물도 한국전쟁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위성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양주관아지는 객사가 있던 유양초등학교에서 양주별산대 놀이마당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양주구읍은 의정부시에서 동두천시에 이르는 3번 국도에서 주내로 통하는 350번 지방도를 따라 동쪽으로 약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구읍은 북쪽으로 해발 520m의 불국산(일명 불곡산)을 등지고 있으며 동쪽으로 고도 100m 내외의 구릉이 감싸고 서쪽에는 해발 213m의 파산, 남쪽에는 해발 285m의 호명산이 사방을 둘러싼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앞쪽으로 서원천의 지류가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고구려의 남평양성이었는데 백제가 이를 취하여 370년(근초고왕 25)에 남한산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었고 474년(개로왕 20)에 고구려 장수왕이 다시 취하여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552년(진흥왕 13)에 신라가 이곳을 획득하여 556년(동왕 17)에 북한산주라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4)에 한양군으로 개칭하였다. 940년(태조 23)에는 승격하여 견주라 하였으며 983년(성종 2)에는 12목< 牧 >의 하나로 목사< 牧使 >를 두었고 995년(성종 14)에 12주의 절도사를 두었는데 양주좌신책군이라 하여 해주의 우신책군절도사와 함께 2보로 삼았다. 1012년(현종 3)에 2보와 12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라 개칭하였으며 1018년(동왕 9)에는 지양주사로 낮추었다. 1104년(숙종 9)에 남경유수관으로 하였고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로 고쳤다. 1395년(태조 4)에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면서 치소를 견주(현 주내면 고읍리)로 옮겨 양주군이라 하였고 1397년(동왕 6)에 다시 부로 승격하여 부사를 두었으며 1400년(태종 1)에는 지양주사로 낮추었다. 1410년(태종 10)에 양주목으로 승격하고 1413년(동왕 13)에 도호부로 다시 바꾸었으며 견주와 사천, 풍양의 3현을 속하게 하였다. 1430년(세종 12)에 다시 목으로 하였고 관내에 파주, 고양의 2군과 영평, 포천, 적성, 교하, 가평의 5현을 두었다. 1504년(연산군 5)에 왕이 유행하는 장소로 백성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양주목을 없애고 일부는 이웃 고을에 속하게 하였다가 1511년(중종 6)에 다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혁시 한성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양주군이 되었고 1922년에는 군의 치소를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1동)으로 옮겼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관아가 파괴되어 복구하지 못하였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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