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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변화

younghwan 2010. 11. 2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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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면서 일본의 지원하에서 갑오개혁이 있었으나, 삼국간섭(1895년),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는 열강들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신은 열강의 간섭에 시달리던 당시의 상황에서 생긴 자주독립의 열망이 그 근본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으로의 변신은 궁왕이 황제를 칭하는 것의 그 핵심이며 이는 갑신정변 이후 여러차례 건의가 있었으며, 아관파천 이후 열강들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서 대한제국의 선포가 가능했다. 고궁박물관에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법령의 개정부터 복식의 변화 등 여러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학부직원록. 1900년에 작성된 학부의 직원목록이다. 학부는 근대적인 교육행정기관으로 1896년에 학무아문이 개칭된 것이다.


궁내부관제. 궁내부에 대한 연혁,소속관청의 규정 등을 기록한 책이다. 궁내부는 1894년 관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왕실사무를 국가 사무와 분리하여 전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근대적  관제개편

19세기말 고종은 국내외의 급변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고 근대적인 사업수행을 전담할 전문부서를 증설, 세분화하는 관제개혁을 수차례 단행하여 기술지식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기관을 대폭 증설하였다. 국가사무와 왕실사무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는데, 특히 궁내부에는 왕실 사무뿐만 아니라 철도 등의 개혁을 이끌어가는 핵심기구를 두고 근대화 정책을 이끌어 나갔다. <출처: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여권. 대한제국 외부에서 1904년 10월 8일 상인 이상목에게 발급한 여권으로 통상과 여행을 위해 인천항을 출발하여 일본 도쿄 등지로 여행하는 일정을 증명하고 있다.


대한예전(복제).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새롭게 마련한 예전이다. 체제는 기존의 국조오례의를 기반으로 하고 황제국 의례는 명나러 것을 참고하였다. 환구단 도면, 황제 복식, 깃발 등의 도설이 실려 있다.


환구단의궤(복제). 환구단에서 동지에 지내는 제사 축식을 싣고 있다. '환구단의궤'는 본래 광무연간에 편찬한 것에 융희 연간에 수정한 내용을 첨가한 것으로, 두 시기의 모습을 동시에 알 수 있다.


환구단 사진. 현재 조선호텔이 있는 자리에 있던 환구단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황궁우만 남아 있다.


우전선로 도본


관인


국민소학독본, 1895년 학부편집국에서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이다. 국한문 혼용체로 우리나라 전통역사와 세계 공물과 선진문물을 소개하고 있다. 1910년 11월에 발매금지 처분을 당하였다.

근대식 교육의 도입
개항 이후 사회가 급변하면서 이에 맞는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외국어 교육기관인 동문학 설치를 시작으로 1895년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되고 전 국민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소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근대적 개화에 필요한 각 분야의 인재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교과서를 편찬하여 새로운 문물과 기술을 알리고 더불어 민족의식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황성신문. 황성신문은 남궁억 등이 국민을 계몽하고 외세 침입에 항쟁하기 위하여 1898년 9월 5일에 창간한 신문이다. 한자위주로 발행되어 한자지식인들이 주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문의 발간
개화기에는 국내와 사정을 민중에게 알려 계몽하기 위해 다양한 신문 발간이 이루어졌다. 나라에서 발간한 '한성순보'를 시작으로 민간신문들이 차례로 창간되었다. 각종 민간신문들은 논리적이고 호소력있는 논조로 민중의 자주 독립과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일본의 내정간섭을 강하게 비판하는 등 민족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전환국인. 1883년 설치된 최초의 상설조폐기관이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재정고문 메가카다네타로우의 건의에 의해 폐지되었다.


호조태환권 원판.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인 호조태환권의 원판이다. 호조태환권은 1899년 '신식화폐조례' 공포에 따라 신.구 화폐의 교환업무를 위하여 설치된 태환서에서 제조되었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발행되지는 못하였다.


법규유편, 1895년부터 이듬해까지 새로 제정된 여러 법규를 한 책으로 엮은 책이다. 1900년부터 1908년까지의 관복 규정 개정 내용도 실려 있다. 본 내용은 1906년 개정된 문관 대례복의 도안이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신하.

고종과 순종, 황태자 이은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위정자들의 모습을 그린 세밀화로 일본에서 발행되었다. 앞줄에는 왼쪽부터 조중응, 김윤식, 황태자 이은, 태황제 고종, 황제 순종, 임선준, 이완용 뒷줄에는 이재곤, 송병준, 고영희, 이병무가 배치되어 있다. 군복은 계급에 따라 별 개수와 소매 부분의 '人'자형 계급장 수가 달랐다. 원수부의 대원수인 황제는 11줄, 원수인 황태자는 10줄이었고, 대장은 9줄, 부장은 8줄, 참위는 1줄로 수가 달랐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속에서 고종, 순종, 영친왕 등 황실의 군예복을 차려입고 위엄을 갖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친왕 군복. 영친왕이 3~4살때에 입었던 군복으로 부장 예복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영친왕 유년시절 복식.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이자 귀비엄씨 소생인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 어린시절 착용하였던 망토이다. 망토는 우리나라 개화기에 착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겉은 검정색 융이고 안감은 홍색공단으로 되어 있다.

서양식 관복장 도입
개항 이후 양복을 입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본격적으로 관복을 서양식으로 입기 시작한 시기는 1895년 을미개혁 때였다. 우선은 무관복부터 '육군복장규칙'과 '경무사 이하 복제'를 제정하여 군의 근대화에 발맞춰 나갔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인 1900년에는 '문관복장규칙'도 반포하여 문관복도 서양식 관복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서양식 문무관복은 크게 예복과 상복으로 나눠 행사와 일상 업무 등에 용도별로 구분하여 입었으며, 신분에 따라 문양이나 개수에 차등을 두었다. 군복의 표장으로 오얏꽃을 채택하였으며 문관의 복장은 주 문양으로 무궁화를 택하였다. 문부관 중에서도 궁내부 관원은 주 문양으로 오얏꽃을 택하였다. 이렇게 채택된 서양식 관복은 이후 몇 차례 형식이 개정되었는데, 신.구의 서양식 관복을 모두 입을 수 있게 하였다. 고종은 중요한 행사에는 전통 관복을 착용하여 전통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서양식 복식을 도입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대한제국의 문화
대한제국이 선포된 전후 시기에는 서양의 문화가 대량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건축이나 도시 구조 뿐만 아니라 의.식.주와 관련된 새로운 용구와 장식품이 수입되었다. 전통 복식과 함께 서양복식을 받아들였으며 서야의 찬송가 등 음악과 양금을 비롯한 각종 악기도 수용되었다. 한편 식생활에서도 서양식 식기류와 조리 용구를 이용하였다. 도자기는 프랑스.영국.중국.일본 등지에 주문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구와 장식용품, 교통수단 등에도 서양식의 새로운 물품을 특별히 주문 제작하여 들여 왔는데, 가구는 화려한 조각과 금칠로 당시 유럽에서 각광받던 프랑스제를 선호하였다. 이들 물품에는 대한 제국을 선포한 후 상징문양으로 쓰였던 오얏 문장이 표시되어 있어 대한제국황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얏문장은 대개 다섯 꽃잎에 각각 3개씩 꽃술이 있는 도안을 기본으로 하였는 이 문장은 우표.입사.화대.황실용 도자기를 비롯하여 공예품, 가구, 훈장, 군복, 건축물에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한편 미술에서도 서양식 화법이 도입되고 서양식의 풍경화와 인물화가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서양의 음악과 양금을 비롯한 각종 악기도 수용되었다. 서양식 물품의 유입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 과정의 대세에 따른 것이었으며 황실 내에서는 서양식과 서양기술을 접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대한제국기 궁궐내부 모습.

대한제국기 궁궐에서는 침대, 의자, 탁자 등의 가구나 화병, 장식용품을 비롯한 서양식의 실내 장식용품이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를 통해 수입되어 사용되었다. 서양식 가구의 도입으로 궁권의 생활은 동.서양의 모습을 아우르며 점차 입식 생활로 변모되었다. 매화 병풍은 1906년 양기훈이 그린 그림에 수를 놓은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대한제국시절 사용했던 어차.


 

대한제국의 개혁추진
대한제국은 황제국 선포 후 국정 전반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법전을 정비하기 위하여 신.구법을 절충한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1899년 8월에 대한국국제를 제정.공포하였으며 황제가 정치.군사.재정을 장악하여 국가 역량을 총결집하였다. 그리고 사례소에서 '대한예전'을 제작하여 '국조오례의','국조속오례의'체제를 벗어나 황제국의례를 갖추었다. 왕후는 황후에, 왕세자는 황태자에, 왕자들은 친왕에 책봉하는 등 황제국 체제로 바꾸어 국가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아울러 전연.전찬 등의 행사를 황제식으로 격상하였다. 한편 최고 군통수부로 원수부를 황제직속기구로 설치하는 것을 비롯하여 군사 체제를 혁신하고, 군대를 증강하여 국방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 기존의 왕의 직속 기구였던 궁내부의 역할을 확대 강화하여 여기에다 근대화 추진을 위한 주요 정무와 사업을 직접 총괄하게 하였다. 궁내부 내의 근대화 사업추진 기구로 통신사, 철도원, 서북철도국, 광학국, 수민원(외국여행관리), 평식원(도량형관리), 박문원, 내장원(재정관리) 등 각종 부속 기구를 두어 근대화 사업에 매진하게 하였다. 교육부분에서는 실용교육과 관리양성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1895년 4월에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성사범학교관제'를 공포하였으며 계속해서 '소학교령','외국어학교관제', '중학교관제' 등 서양식 학교 법제를 제정하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아울러 의학.상공업.우편.전기.법학 등의 각종 기술자와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하여 근대적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한국이야기, 일본에서 외교관직을 두루 지낸 영국인 조셉 H.롱포드가 한국의 역사를 고조선부터 20세기까지 서술한 역사서이다. 서울.평양의 모습 등을 도판으로 실어 당시 풍속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버튼 홈즈 여행기. 미국의 여행가이자 사진작가인 버튼 홈즈가 1900년 전후에 한국을 방문한 후 쓴 여행기이다. 경운궁 사진, 명성황후 홍릉의 사진 등이 실려 있다. 1908년에 발행된 것을 1919년에 재발행한 책이다.


해밀턴의 '한국'. 앵거스 해밀턴이 1901~1903년에 대한 제국을 방문하고 쓴 견문록이다. 해밀턴은 영국 신문 기자로 당시 대한제국의 사회상을 통계를 바탕으로 실증적으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 자료 참조: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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