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조선은 갑오농민 전쟁과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구 열강과 청.일의 간섭속에서 조선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는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구한말 조선의 정치적.경제적 역량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선언적 의미가 강한 조치였지만, 나름대로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대외적으로 독립국을 알리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다는 것은 유교적인 전통 예법에 따라서 왕의 호칭이 황제로 격상되며, 왕후는 황후로, 왕세자는 황세자로 명칭이 변하고, 왕자들은 번왕으로 임명되는 조치들이 뒤따랐다. 또한 조선을 건국할 때의 예에 따라서 고종의 4대조까지 황제로 추존하는 절차도 있었다. 황제를 칭함에 따라 조선에서는 폐지되었던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환구단이 설치되었고, 각종 법제와 의례도 황제에 걸맞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대한제국은 덕수궁을 황제가 거쳐하는 정궁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덕수궁 정비도 실시하였는데 완성되지는 못하였지만, 그 모습을 덕수궁에서 볼 수 있다.
고궁박물관에서는 대한제국이 선포됨에 따라서 취했던 조치들 중에서 유물로 남아 있는 각종 어보와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는 절차를 담은 의궤, 황제 즉위 기념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한제국 선포가 선언적 의미를 갖는 조치였지만, 이에 따른 많은 조치들이 뒤따랐으며 그 흔적들을 고궁박물관, 덕수궁, 환구단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대한제국 선포 기록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 하였아.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고종실록, 36권, 1897년 10월 11일>
* 대한제국 선포 일지
- 1897년 8.14 연호를 '광무'로 정함
10.11 국호를 '대한'으로 제정
10.12 황제 즉위 및 황태자 책봉
10.13. 대한제국 선포
10.14 왕태자비 민씨를 황태자비로 책봉
11.22 명성황후를 청량리 홍릉에 장례
12.02 황제 즉위일인 10월 12일을 계천기원일로 정함
- 1999년 8. 17 '대한국국제' 반포
12.07 태조,장조,정조,순조,문조를 황제로 추존
- 1900년 8.17 이강, 이은을 의친왕, 영친왕으로 책봉
1902년 12.03 고종의 망육순을 기념하는 외진연 거행 <출처:고궁박물관>
황제어새와 내함. 고종이 황제의 자격으로 도장을 찍을 일이 있을 때 간편하게 사용하던 인장으로 주로 친서나 밀서에 사용되었다. 이를 보관하던 내함은 상단과 하단으로 구성되어 어보와 인주를 넣었다.
대례의궤.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관련된 여러 의례와 작업들을 기록한 책이다. 황제 즉위식과 황후.황태자 책봉, 각종 의장물과 어책.어보 제작 등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반차도 도설이 실려 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변화상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가임을 국내외에 알리고, 각종 의정과 제도 등의 국가 의례를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높여 재정비하였다. 따라서 국호와 연호도 자주적으로 '대한'과 '광무'로 바꾸고, 궁의 보개나 답도 등의 문양을 봉황문양에서 용문양으로 바꿨다. 의복과 의장.의궤 등에는 황실을 나타내는 황색을 사용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장조 황제 추존 어보, 정조 황제 추존 어보
순조황제 추존 어보, 문조황제 추존 어보
5대조 추존.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의 4대조에 대한 추존 작업이 있었던 것처럼 대한제국에서도 1899년 고종의 직계 4대조(장조.정조.순조.문조)와 조선을 개국한 태조에 대한 추존작업이 이뤄졌다. 태조는 고황제, 장조는 장조의황제, 정조는 종조선황제, 순조는 순조숙황제, 문조는 문조익황제로 추존하고, 왕비는 황후로 추존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금보.금책. 대한제국을 선포함과 동시에 이미 서거한 명성왕후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제작한 금보와 금책이다. 금보의 손잡이는 용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인면에는 '황후지보'라고 새겨져 있다. 대한제국 선포이전에는 왕과 왕비에게는 옥책을, 왕자와 왕자비에는 죽책을 만들었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크게 바뀐 조치이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일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 장례를 치르고 황제비에 걸맞게 여러 조치들을 취했다.
경운궁 현판, 경운궁 즉조당에 걸려있던 현판으로 고종이 직접 쓴 글씨이다. '경운궁'은 덕수궁의 원래 이름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했던 건물이며, 고종의 환궁이후에는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 대한제국의 법전으로 세운 건물이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소공동에 있는 환구단 건물인 황궁우.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황제가 거행하는 제천의식을 치러기 위해 소공동에 환구단을 설치하였다. 제례의식을 치르는 환구단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섰으며, 황궁우 건물은 여러곳을 옮겨다니다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중국 북경에는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공원 내에 환구단, 황궁우가 있다.
고종옥책.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건행곤정영의홍유라는 존호를 올릴때 제작된 옥책이다.
고종 즉위 40년 기념장. 고종의 망육순과 즉위 40년 기념장이다. 앞면에는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이라는 누각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기념문구와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새겼다.
서울 중심부 세종로 교보문고 앞에 있는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이다. 조선 왕실에서 마지막으로 건설한 건축물이라 한다.
고종 즉위 40년 기념
1902년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고종이 51세가 되어 육순을 바라보는 해였다. 고종에게 새로운 존호를 추가로 올리고,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드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진연을 베풀었으며, 어진을 제작하였다. 아울러 대한제국과 황제의 위상을 알리고자 세종로 네거리에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비를 건립하고, 기념장, 기념우표 등을 발행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 즉위 기념장과 순종 가례 기념장. 순종 즉위 기념장은 1907년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강제퇴위 당하고 순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제작된 기념장이다. 전면에는 이화문을 중첩시키고 꽃잎에 '즉위기념장'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순종 가례 기념장은 당시 황태자 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의 가례기념장이다. 마주 앉은 비둘기 한쌍을 새겨서 부부금슬을 나타내고 있다. 뒷면에는 기념장의 이름과 '광무 십일년 일월 이십사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영친왕 황태자 책봉시 금보. 순종 즉위 후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될 때 제작된 금보이다.
대한 제국의 성립
고려 왕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건설한 조선은 전기에는 선진 외래 사상인 성리학을 받아들여 세종대 이후로 한글.자격루.경국대전.국조오례의 등 찬란한 민족문화를 이룩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겪었지만 경제를 다시 일으키고 문화를 진작하여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중국과 서양의 신문화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연구하여 근대 문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정조 임금 사후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 세도정치 때문에 개혁의 시기가 많이 늦추어지고 사회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즉위한 고종은 1876년 개항을 하고 1890년 12월에 외교.통상 업무를 강화하고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를 주도하였다.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에 의한 침탈이 자행되었는데, 지정학적으로 열강들의 주목을 받은 조선은 국제관계에서 독자적이고 근대적인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고종은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제국의 터전을 마련하고 조선 세조 이후 폐지되었던 제천의례를 드리기 위해 환구단을 다시 건설하였다. 1997년 연호를 광무,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시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 등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미국.유럽을 통해 전기.철도.금융.건축 등의 신기술과 문화체계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기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헛되이 침략적 제국주의자에게 끝내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세계 선진 국가를 이룩하려고 했던 노력과 정책 덕택에 일제식민지배하에서는 민족적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광복후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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