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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 (보물20호)

younghwan 2010. 12. 1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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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사는 서해안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보령시에서 내륙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서 조금만 들어오면 있는 옛 절터이다.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도량의 하나로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대형사찰이었다. 성주사 옛 절터에는 오층석탑 1기와 3기의 있는데 3기의 3층석탑 중 가운데에 있는 석탑이다. 3기의 석탑은 같은 양식을 하고 있지만 그 중 몸돌 조각 수법에 제일 화려하고 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이다. 전제적으로 비율의 잘 이루어져 있으며,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신 몸돌의 남북면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자물쇠와 문고리가 조각되어 있다. 잘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구성품의 비율, 조각 수법 등에 있어서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면에서 크게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든 석탑으로 통일신라말기의 대량제작에 따른 정형화된 형식의 석탑인 것으로 보인다. 석탑의 위치 또한 금당 뒷편에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심의 가람배치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약간의 장식적인 의미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제작수법의 독창성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석탑제작기술의 전성기를 조금 지난 시기에 만든 석탑으로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부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단분 넓고 낮게 만들어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


기단부 상단은 1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것 처럼 기둥을 새겨놓고 있다. 기둥 이외에는 별도의 문자나 부조를 새겨놓고 있지는 않고 있다.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3층의 탑신. 1층 몸돌 남북면에는 장식을 조각해 놓고 있으며, 지붕돌은 추녀가 하늘로 치솟는 모양으로 만들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신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과 문짝 모양을 조각해 놓고 있으며 자물쇠 아래로 짐슴 얼굴모양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해 놓고 있다.


옆면에는 특별한 장식을 새겨 놓고 있지는 않다.


석탑의 뒷면은 많이 훼손되어 있다.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성주사지 금당 뒷편에 3기의 3층석탑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찰의 가람배치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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