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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보령읍성 성곽과 관아문

younghwan 2011. 6. 2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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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는 주포면 소재지이자 조선시대 보령현 관아가 있었던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현재의 보령시는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개편으로 보령,남포,오천군이 합쳐져서 만들어졌으며, 군청이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에 가까운 대천지역으로 1914년에 이전하면서 행정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고 작은 면소재지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보령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 있는 보령읍성 성곽의 일부와 남문 문루인 해산문, 보령향교가 이 곳이 옛 보령현의 중심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옛 보령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주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이 학교 담장과 출입문 역할을 했던 읍성 성곽의 일부와 남문 문루인 해산루가 남아 있다. 보령 읍성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처음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태종때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해안지역의 읍성의 하나로 세종때 기존의 성을 보강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곽은 높이 3.5m의 석축성으로 바깥쪽에만 돌로 쌓은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왜구의 침입가능성이 낮아지면서 무너진 부분이 보수되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보령읍성 남문 문루인 해산루. 남문을 들어서면 주포초등학교 교정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아마도 학교 담벼락으로서 용도가 있어서 오늘날까지 남문 부근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루에 걸려 있는 해산루라고 적혀 있는 현판.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문루는 장초석 위에 기둥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로 당시 전국에 똑같이 만들어진 관아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문루는 3칸건물이지만 출입문은 하나이다. 성곽의 성문에는 출입문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보령읍성 문루는 단순한 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다.


문루 내부.


읍성 안쪽에서 본 보령읍성 남문
 
보령 관아문,
조선시대 보령읍성의 남문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당시 전국에 똑같이 만들어진 관아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정문에는 해산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로 전해온다. 보령현은 고려초부터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현감이 파견되었고, 효종 3년에는 보령부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다시 보령현으로 고쳐졌다. 보령읍성은 세종 12년(1430)에 현감 박효성 등이 축성을 완성하였고, 세종 14년(1432) 현감 정대는 140칸의 관아건물을 완성했다. <출처:보령시청>


성곽은 바깥쪽은 큰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은 전형적이 석축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축을 쌓은 돌들이 상당히 크고 잘 다듬어져 있다.


석축은 주로 큰 돌을 다듬어서 쌓았으며, 빈틈을 작을 돌로 메꾸고 있다.


안쪽은 문루 양쪽만 돌로 쌓고, 다른 부분은 흙을 쌓았다.


성문을 엄호하는 적대.


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과 마찬가로 화살이나 총탄을 피하기 위한 여장을 별도로 설치하지는 않고 있다.


석축을 쌓은 돌 중에서 깨끗한 것이 많은 것을 봐서는 최근에 많은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곽 앞쪽에 모아 놓은 각종 공덕비

보령성곽
성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아올린 큰 담이다. 이 성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을 때비하여 쌓은 봉당성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위치에 1430년(세종 12년)에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아 만든 것이다. 성을 쌓는 방법은 안팎 양면을 돌로 쌓아 올렸고, 남분터의 왼쪽과 오른쪽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벽은 바깥쪽만 돌로 쌓아 올렸다. 성의 규모는 둘레 630m, 높이 3.5m이고, 성에는 적대 8개소, 남.북.동문 3개소, 우물 3개소 등이 있었다. 1432년 제민당.공아.병기고 등 140여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손되고, 남문이 해산루 옆 성벽 약 70m와 북쪽 성벽 약 360m 만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보령시청


보령리에서 청라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세워진 보령정이다. 보령리 동쪽의 진당산과, 동남쪽의 배재사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보령정에서 옛보령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보령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옛 보령현 지역.


산 아래 마을이 보령읍성과 옛 보령현 관아가 있던 지역이다.


멀리 서해 천수만 입구와 충청수영이 있던 오천항 주변이 보인다.


내륙지역인 청라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보령리
동쪽에 보기좋게 우뚝솟은 높이 351m의 진당산을 주산으로 하고 높이 250m 내외의 배재산 연봉이 동남쪽을 에워싸고 100m 내외의 나즈막한 뒤뫼능선은 북쪽을 감싸고 있으며 서쪽은 넓고 기름진 들판이 훤하게 트여 있으면서 고남산, 천마산을 안산으로 하고 주위에 흐르는 물로 이루어진 봉당천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으나 과연 명당지지로 평화롭고 살기좋은 마을이다. 오성지간(오서산과 성주산의 사이)에 만대 영화지지라는 전설과 함께 옛부터 국가 변란이나 천재지변에도 큰 재해가 없었던 복받은 고장으로 만세보령의 본고장이다. 백제때에는 신촌현, 통일신라때에는 신읍, 고려때에는 보령현, 이조때에는 보령군이라했고 1910년 한일합병이 되면서 보령,남포,오천의 삼개군을 통합하여 보령군으로 하고 이곳에 군청을 두면서 읍내리라 부르다가 1914년 군청이 대천으로 옮겨가자 주포면사무소가 되면서 신성리라 했고, 1922년 10월부터 보령리라 부르게된바 결국 보령리는 옛부터 지역행정의 중심지로서 보령성을 비롯하여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출처:보령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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