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송리에 있는 작은 포구인 오천항은 조선시대 충청수영이 있었던 곳이다. 충청수영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한반도와 중국 해안지방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던 왜구를 견제하기 위히 설치한 수영으로 충청병마절제사가 있었던 해미읍성과 함께 서해안을 방어하던 요지였다. 충청수영은 조선초에 설치되어 수영인 폐지된 1896년까지 오랜기간 동안 존속했던 곳으로 조선 세종때의 기록에 의하면 산하에 배속된 군선이 142척에 수군이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수영의 주 임무는 삼남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 등을 운반하는 조선선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영역은 금강하구에서 경기만 일대까지라고 한다.
충청수영성은 오천항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해안가쪽으로는 대부분 경사가 급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천항과 그 인근 근대에 들어서 크게 발전하지 못해서 그런지 성곽의 대부분과 주변 지형의 옛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충청수영에는 객사와 동헌 등 수십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는지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객사와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건물, 동헌인 공해관 아문만이 남아 있다. 충청수영은 천문만 입구의 수려한 경관으로 조선시대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의 찾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대천해수욕장 주변의 해안으로 피서를 떠났던 인사들이 수군에서 운영하는 배를 얻어 타보고, 서해안에 해산물도 즐길 수 있었기때문에 이곳을 찾았던 인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산만에서 충청수영이 있는 보령 오천항까지 넓은 평야지대에 내포평야가 있어서 여행객들을 맞아줄 부유층들이 많아서 조선시대에 여행하기에 편리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남 보령시 오천항 뒷편 언덕에 있는 충청수영 성곽. 읍성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성곽내부에는 관아건물들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수영성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홍예. 원래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홍예만이 남아 있다. 성곽으로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고, 계단길을 걸어서 올라간다. 원래는 마차가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문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출입문 주변의 성곽. 언덕위에 크고 작은 자연석을 다듬어서 성곽을 쌓고 있는데,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축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홍예 아래쪽 성벽을 복원하고 있다.
마을 뒷편의 성벽.
성문 안쪽에서 본 홍예만 남아 있는 성문 주변. 최근에 보수한 흔적도 일부 보인다.
충청수영 성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수영이 폐지된 이후 개인이 주택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대 이후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진휼청 앞에 심어진 오래된 고목. 원래 성곽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것이 보통인데 아마도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에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충청수영 성벽길. 충청수영성은 석축성으로 별도로 여장을 마련해 두고 있지는 않다.
성벽은 잘 다듬어진 산책로처럼 되어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다.
충성수영 아래에 있는 오천항. 수영이 폐지되기 전에는 많은 병선들이 정박해 있던 큰 포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시골의 조그만 어항으로 남아 있다.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천수만 입구 바다 풍경이 상당히 수려하다.
충청수영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영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진휼청에서 영보정이 있던 언덕으로 올라오는 성곽길
충청수영 관아 건물들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오천면 면소재지 관청 건물들이 주로 있다.
천수만 해안의 경치를 즐기던 영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건물터로 보인다. 지금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영보정 앞 성벽 위에서 보이는 바다풍경.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읍으로 통하는 물길이 있다
광천읍으로 통하는 물길에 지금은 방조제가 놓여 있어서 광천까지의 뱃길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영보정 앞 성벽. 충청수영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장소이다.
영보정 주변 성벽
영보정 건물터에서 발굴된 건축자재들
계속 이어지는 성벽길
해안절벽위에 성벽을 쌓아서 바다로부터 충청수영성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성곽은 오천항으로 들어오는 도로가 지나가는 언덕에서 끊어진다.
도로건너편에는 원래 오천초등학교자리에 있던 충청수영 객사건물이 옮겨져 있다.
충청수영 객사. 전라좌수영 객사인 여수 진남관이나 통제영 객사인 통영 세병관에 비해서 객사 건물의 규모는 작은편이다. 수영객사라서 그런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충청수영 동헌인 공해관 아문도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객사 건물앞으로 옮겨진 각종 공덕비
안쪽는 성벽이 훼손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충청수영성 전경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성은 조선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되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1일 왜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하였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장소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과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청도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 요처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출처:보령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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