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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충현서원지, 오리 이원익 선생을 모셨던 서원이 있었던 자리

younghwan 2011. 6. 2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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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기도 광명시 소하리에 있는 오리 이원익선생 종택이 있는 곳은 선생의 후손들이 살아왔던 종갓집이기도 하지만, 종택 뒷편에는 선생을 모신 충현서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옛 건물터와 복원되 정자 등이 남아 있는 이 곳은 원래 고려 강감찬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인 삼현사가 있었다고하며, 숙종때 이원익을 모시면서 충현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 서원건물터를 살펴보면 건물은 그리 크거나 많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건물이 강당이나 동.서재가 크게 있었던 같지는 않고 사당 위주로 서원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서원의 성격이 교육기관에서 배향공간으로 기능의 변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교육기관이나 여론형성의 기능이 약했던 경기지역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충현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복구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신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오리영우'가 배향공간의 성격을 대체했기때문에 오리 종가에서도 서원을 복원할 필요성을 그리 갖지 못햇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옛 서원터 아래에는 사랑채이자 정자라고 할 수 있는 관감당이 남아 있고, 종갓집 또한 최근 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보인다. 지금은 도심속의 작은 공원이자 박물관으로 후손들에게 오리대감의 발자취를 한번 살펴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오리 이원익을 모신 충현서원이 있었던 옛 건물터. 서원의 건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배향공간인 사당 위주의 서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뒷편에 복원된 정자 들이 있다. 사당 뒷편에 정자가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일반적인 서원의 공간배치와는 약간 달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옛 서원 건물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놓여 있다.


문비대. 문비는 무비의 대비되는 용어로 학문과 교육에 대한 준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문비대는 서원의 교육적 기능과 부합하는 이름으로 서적 등을 보관하던 건물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현서원 건물터. 서원 건물에 사용했던 초석들이 불규칙하게 놓여져 있다.


충현서원터로 들어가는 길

충현서원지
현재 터만 남아 있는 이 곳은 조선중기의 명재상이었던 오리 이원익의 뜻을 기려 제사하고 지방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건립된 충현서원 터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고려의 강감찬 장군과 서견 등을 모시기 위해 효종 9년(1658)에 세운 삼현사가 있었던 곳인데, 숙종 2년(1676) 이원익을 함께 모시면서 충현서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원익은 선조2년(1569)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평양성을 도로 빼앗기 위한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로를 세워 영의정에 올랐다. 관해군 때에는 인목대비를 폐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유배생활을 하게 되면서 정치에서 은퇴하였다. 그후 인조반정 때 다시 영의정으로 등용되어 반정 초기의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청렴결백하게 생활하였으며, 서민적이며 소탈한 성품으로 백성들은 그를 '오리 정승'이라 부를 정도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시호는 문충공이다. <출처:충현박물관>


오리 이원익 영우.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모신 건물이다. 이 건물의 내력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아마도 충현서원이 폐철되면서 사당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리 이원익 영우,
영우란 영정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재상인 오리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선조 13년(1580) 이전의 이원익의 영정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은 비가 새는 2칸 초가 대신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이원익의 집터 위에 숙종 19년(1693)에 건립된 사당이다. 이원익은 당시 백성들이 '오리정승'이라 부를 정도로 소탈하고 청렴한 생활을 한 서민적인 정승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 두순찰사로 평양성을 다시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선조.광해군.인조 등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기단과 초석은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건물의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만든 건물로 보인다. 또한 다른 사당과 달리 영정을 모시는 감실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출처:충현박물관>


오리 영우에 모셔진 이원익 선생 영정

이원익 선생 영정
오리 이원익은 전주 이씨로 조선시대에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문신이다. 가로 0.7m 세로 1.5m의 이 초상화는 관리들이 평상시에 쓰는 오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서 호피가 깔린 의자에 얼굴과 몸을 왼쪽 방향을 살짝 돌려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인 형식은 공신도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호성공신상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가슴에 부착된 한 마리의 학이 그려진 흉배는 이 초상화가 공신책록을 받은 선조 12년 이전, 당하관에 재직할 때에 그려졌음을 말해준다. 그림속 이원익은 몸을 왼쪽으로 살짝 돌아앉아서 오른손엔 부채를, 왼손은 허리띠를 잡고 있는데, 손의 형태가 미숙하게 표현되어 있다.얼굴의 처리는 음영효과가 들어 있으며, 수염.눈썹.뺨 등은 엷은 묵으로 처리한 뒤에 묵선으로 다시 덧칠하고 있다. 눈은 금니를 칠하지 않았나 생각될 만큼 눈동자 주위에 금니가 남아 있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이 왼쪽 얼굴을 보이는 데 비하여, 오른쪽 얼굴을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출처:충현박물관>


오리영우 출입문인 삼문


충현서원 뒷편에 복원되어 있는 큰 정자인 삼상대. 사당 뒷편에 정자를 두고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삼상대 표지석

충현서원지 일대에 있었던 표석으로 오리 이원익 선생과 관련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삼상은 일반적으로 삼정승을 모두 일컬을 때 쓰는 용어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원익 선생이 삼정승을 두루거쳤으며 많은 치적이 있었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 및 문인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충현박물관>


충현서원 뒷편의 작은 정자인 풍욕대이다.


풍욕대에서 내려다 본 충현서원터


서원터 서쪽편으로는 오리 이원익선생 일가의 묘들이 모여 있다. 오리 이원익의 후손들은 그의 유지를 따라서 조상의 묘가 있는 이곳에서 대대로 자리잡고 살아오고 있다.


이원익의 부친인 함천군 이억재의 묘지명이다.


묘소들 아래쪽에는 오리 이원익 집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공원처럼 생긴 휴식공간이 있다. 이 건물은 지금은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을 기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관감정은 오리대감이라 불리웠던 조선중기 문신 이원익 선생이 만년을 보낸 누정이다. 앞면 5칸의 사랑채 건물처럼 생긴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그의 후손들이 중건한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세웠던 정자 건물 형태를 그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 가운데 2칸은 문이 달려 있는 대청마루로 보이며,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관감정 앞에 있는 작은 지석묘인 탄금암.


탄금암
오리 이원익 선생이 거문고를 연주하던 바위이다.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로 알려져 있다. 선생의 문집인 <오리집> 연보에 따르면, 선생은 서울 동숭동 인근에 사실 때 자주 낙산에 올라 거문고 연주를 즐기셨다고 한다. 또한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의 문집에도 <문충공유금내력전말기>라는 글이 있어 선생이 거문고를 좋아하셨음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충현박물관>


관감당 출입문


오리 이원익 선생의 후손들이 살았던 종택


충현박물관


옛 충현서원터이자 오리 이원익선생 종택이 있는 충현박물관 입구. 이 박물관은 사전에 예약을 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


충현서원터 앞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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