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빈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이다. 이 곳은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정착한 달성군 묘골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낙동강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본래 이곳에는 박팽년을 모신 사당이 하빈사가 있었으며, 현손인 박계창이 사육신이 나타난 꿈을 꾼 후 사육신 여섯분을 함께 제향했으며, 인근에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세웠고 1694년에는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낙빈서원은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강당만 복원하였다고 하며, 사당인 육신사가 1970년대에 후손들이 집성촌인 묘골에 건립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낙빈서원은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에서 출발한 초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던 사당에서 출발한 조선후기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서원이다. 이 곳은 박팽년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삼가헌이라는 사랑채를 지으면서 터를 잡고 사는 작은 마을이다.
달성 낙빈서원 전경. 박팽년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인 하빈사에 출발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마을 뒷편 동산에 강당만 복원하여 유지되고 있다.
마을을 지나서 낙빈서원으로 올라가는 길.
낙빈서원 출입문
낙빈서원은 현재 강당만 복원되어 있다. 강당 건물은 앞면 4칸으로 가운 2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서원의 원래 기능인 교육기능은 상실하고 문중 재실 역할만이 남아 있는 조선후기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가운데 2칸의 대청마루는 문중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로 보인다.
양족에 1칸씩 있는 온돌방
기둥을 세운 주춧돌
낙빈서원이 있는 이 마을은 낙동강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조용한 마을로 박팽년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세운 삼가헌이라는 고택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삼가헌 별당인 하엽정. 연못에 심어둔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낙빈서원 올라가는 길에는 최근에 세운 한옥을 볼 수 있다.
원래 서원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어야 하지만, 낙빈서원 사당은 오랜기간 복원하지 못하다가 1970년대 후손들의 집성촌인 묘골에 육신사를 세워서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낙빈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92
이 곳에는 본래 충정공 박팽년의 위패를 봉안한 하빈사가있어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왔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공의 현손인 박계창이 사육신 여섯 분이 함께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깨달은 바가 있어 다섯분의 신위를 더 설치해 함께 제향하게 되었다. 1691년(숙종17)에는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묘와 강당을 건립하여 낙빈서원을 창건하였는데, 3년 후인 1694년(숙종 20)에 유생들의 소청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1866년(고종 3)에는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나, 1924년 문중에서 원래 터보다 위쪽인 현 위치에 강당 건물만 중건하였는데, 그후로도 사당을 세우지 못해 서원이라기보다는 문중의 재사와 유사한 모습이 되었다. 1974년에는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묘골의 구 종가터 뒷산에 육신사가 건립되면서 그곳으로 사육신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고 매년 춘추절에 향사를 지내게 되었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토기와집으로 1982년에 복원한 것이다. <출처:달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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