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사 달성군 하빈면 묘리는 낙동강 동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묘골마을이라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박팽년 후손은 단종복위를 꽤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이 살아남은 가문으로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조선후기에는 관직에도 많이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낙동강 동안에 자리잡은 달성군 하빈면에서도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마을로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묘골마을 안쪽에 위치한 육신사는 세조 때 사육신인 여섯분을 모시는 사당으로 원래는 인근에 있던 낙빈서원내 있던 하빈사에서 모셨는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0년대 전국적으로 실시된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원래 하빈사에는 박팽년만을 모셨으나 다른 사육신들은 후손이 없었기때문에 같이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을 모신 아산 현충사와 비슷한 성격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육신사는 문화재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역사적인 인물인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라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사육신을 모신 사당인 육신사는 외관에서부터 1970년대에 세워진 많은 사당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앞쪽에 기념비석이 있고, 높은 계단을 올라 삼문을 거쳐서 사당으로 들어가게 되는 전형적인 사당의 모습을 하고 있다.
육신사 정문. 최근에 대구시와 민원이 있는 모양이다.
육신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육신사 삼문. 성인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인데, 아마도 현충사처럼 콘크리이트로 지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당에서 보이는 육신사 들어오는 출입문과 묘골마을
사당 동쪽편에는 보물 554호인 태고정을 옮겨 놓고 있다. 이 건물은 선조 25년에 처음 지은 건물로 광해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한옥건물 중에는 그 연대가 오래된 것에 속한다.
태고정 아래에 있는 한옥. 아마도 후손들이 살던 집으로 보인다.
육신사 사당으로 올라가는 길. 이 마을에는 옛 한옥도 있지만, 최근에 복원된 한옥도 상당히 많아 보인다. 재력이 풍부했던 양반들이 살았던 동네라 그런지 한옥의 규모도 대부분 상당히 큰 편이다.
묘골마을 입구에 최근 세워진 사육신기념관.
기념관 옆에는 박팽년 후손들의 공덕을 기리는 삼충각이 있다.
원래 사육신을 모셨던 서원인 낙빈서원, 지금은 강당만 복원되어 있어서 문중의 재실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육신사, 대구광역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28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 사육신으로 일컫는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사당을 지을 때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제삿날 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뒤부터 나머지 분들의 음식도 장만하여 함께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 뒤 하빈사를 지어 이들에게 제사지내다가, 1691년(숙종 17) 낙빈서원을 지어 이들을 봉안하고 제사지냈다. 1866년(고종 3) 서원철폐령으로 낙빈서원이 철폐되자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유림들에 의해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워 다시 사육신을 봉안해 왔다. 그 뒤 1974~19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육신사를 건립하였다. <출처:달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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