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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_종묘

강화 용흥궁,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전 거처했던 잠저(潛邸)

younghwan 2011. 9. 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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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읍 역사유적지구라고 할 수 있는 고려궁지,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성당, 강화성공회성당 등이 모여 있는 관청리에 소재한 조선 25대 철종이 강화도 유배시절에 살았던 잠저인 강화 용흥궁이다. 철종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로 그의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살다가 헌종 사후 덕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849년에 왕위에 즉위했다. 철종의 재위시기는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으며, 청나라의 몰락 등 동아시아 정세 또한 극히 나빴던 시기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잠저는 인조, 철종, 고종처럼 정상적으로 왕세자를 거쳐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국왕이 후사가 없거나 반란 등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왕위에 추대된 왕이 민간인 신분으로 살았던 집을 말하며 태조의 함흥본궁, 인조의 저경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철종이 유배시절 머물렀던 강화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던 것을 철종이 즉위한지 4년이 되던해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관아가 있던 지역이라 좁은 골목안에 대문을 세우고 일반 민가처럼 사랑채, 안채, 문간채를 지었는데, 이를 별전, 내전, 외전이라고 부른다.


강화 용흥궁 전경. 강화읍 관청리 언덕에 세워진 강화성공회 성당 아래 주택가에 세워진 한옥건물이다. 원래 초가였던 것을 철종 즉위 후 지은 것이라고 하며, 구한말 서울지역 양반가 저택과 비슷한 양식이다. 솟을 대문과 양쪽으로 외전이라고 불리는 문간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문간채가 있다. 골목과 붙어 있는 문간채는 양쪽에 2칸씩 방을 두고 있다.


안채와 내전 사이에는 별도 담장을 두어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외전에서 내전(안채)로 들어오는 출입문과 담장.


내전이라 불리는 안채. 'ㄱ'자형 건물로 각 앞면 3칸씩으로 가운데 2칸짜리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서울도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의 구조이다.


앞면 2칸, 옆면 2칸의 넓은 대청마루. 앞쪽에는 통로로 사용하는 툇마루를 달아놓아 넓어 보인다.


2칸규모의 안방은 양쪽으로 큰 문을 달아놓아서 시원해 보인다. 구한말 양반가옥에서 사용했던 가구들을 놓아 두고 있다.


'ㄱ'자형으로 달아내어 놓은 큰 부엌.


골목 담장쪽에 만들어 놓은 광.


남쪽편 담장에는 앞면 5칸의 행랑채가 있다. 하인들이 머무는 작은 방과 마루, 3개의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민간주택에 비해서 광이 많은 편이다. 행랑채 왼편에는 안채에서 외부로 출입하는 출입문이 있다.


안채뒷편의 작은 우물과 별전이라 불리는 사랑채와 연결되는 쪽문.


바깥 골목에서 본 행랑채. 서울지역 도시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채라고 할 수 있는 뒷편에 있는 별전. 앞면4칸에 누마루를 두고 있는 조선후기 양반가 사랑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에는 작은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양반가 저택에 비해서는 상당한 소박한 규모의 사랑채이다.


사랑채 왼편에 있는 우물


우물 왼편 언덕에는 이곳에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다.


용흥궁 뒷편에 있는 비각


이 곳이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임을 적어 놓은 비석



강화 용흥궁,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쳐하였던 잠저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다. <출처:강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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