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에 설치된 14개의 성문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대서문이다. 이 성문은 고양시 북한산계곡을 통해서 북한산을 등반하는 가장 쉬운 코스 중 하나로 가장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서울 북쪽 험준한 북한산 능선을 따라 쌓는 북한산성 중에서도 방어상 제일 취약한 곳으로 여겨졌으며, 일상적으로 북한산성을 출입하는 통로이기도 한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서문에서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면 중성문을 만들어 놓고 있다.
대서문은 잘다듬은 크고 튼튼한 화강석으로 석축과 홍예를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올려놓은 전형적인 조선후기 성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예좌우에는 동물머리 모양의 빗물을 빼내는 석누조가 설치되어 있고, 문루 앞쪽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10여개의 여장을 두고 있다. 문루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파손된 것을 1950년대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최근까지도 대서문 안쪽으로는 작은 마을과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하여 국립공원 입구 상가지역으로 옮겼다고 한다.
북한산국립공원 입구에서 언덕길을 20~30분 정도 걸어올라가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북한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서문이다. 일제강점기때 훼손된 것을 1950년대에 고쳤다고 하며, 쌓은 석축에서 오래된 부분과 복원된 부분이 구분되는 것 같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대서문으로 올라가는 숲속길, 원래는 우마차가 다닐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었는데 1950년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혔다고 한다.
대서문 홍예. 북한산성의 정문답게 다른 성문에 비해서 규모가 큰 편이며, 상당히 큰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고 있다.
홍예 좌우에 설치된 빗물을 빼기 위한 동물머리모양의 석누조.
조선숙종때 쌓은 북한산성의 석축은 큰 화강석을 잘 다음어서 쌓은 것으로 전대의 성곽에 비해서 상당히 튼튼하게 보인다. 오른편은 1950년대에 이 성곽을 복원하면서 새로 쌓은 석축으로 보이며 원래 있던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성문 천장에 그려진 그림
석축으로 쌓은 홍예 위에 올려 놓은 문루.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는 문루로 성문 주위를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도록 만들었다.
문루 내부
문루에 설치된 여장은 하나의 돌로 다듬어서 만든 평여장으로 총구는 아래로 향한 근총안 1개씩을 두고 있다.
문루에 올라서 본 동물머리모양의 석누조
대서문 문루에서 내려다 본 경치. 멀리 은평뉴타운지구에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들이 보인다.
대서문 앞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길
대서문 안쪽 북산산성으로 들어가는 길
대서문 문루에서 보이는 북한산 원효봉
산성 내부에서 본 대서문 홍예와 문루
예전에는 대서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었던 성문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안내
안쪽에서 본 북한산성 대서문
북한산 계곡으로 연결되는 성벽
대서문의 역사해설
북한산성 역사 탐방로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적지와 문화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탐방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대서문을 먼저 볼 수 있습니다. 대서문 문루는 일제말기에 파손된 채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58년 당시 최현길 경기지사가 698만환을 들여 문무를 복원하고 우마차가 다니던 오솔길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를 달구지에 싣고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대서문은 홍예문으로 좌우에는 누혈(빗물을 빼내는 기구)이 설치되어 있고 문루여장을 10개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 성벽의 여장과는 달리 한덩어리에 화강암으로 된 평여장이며 총구는 아래로 향한 근총안을 1개씩 둔 것이 특징입니다. <출처: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성,
북한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석축산성으로,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때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개루왕때 (132년)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어기고 한강지역을 차지하면서 진흥왕이 북한산순수비를 세웠다.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2차 침입시 이 산성에 전투를 벌렸던 사실과 거란의 침입시 고려 현종이 태조의 위패를 이곳으로 옮긴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에도 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 및 증축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 숙종 37년(1711)이며,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그때의 것이다. <출처:고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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