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에서 국가나 집단간의 교역을 위한 경제적인 동기와 지배계층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통치를 위해서 문자의 사용이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의 기원 또한 길흉화복을 점치는 행위에서 그 내용을 기록하는 갑골문자 등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종교적인 행위가 당시에는 지배계층의 통치를 위한 정치적인 활동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대국가에서 통일신라까지 시기의 문자 기록 중 상당수는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며, 가장 오래된 문서 또한 붓으로 쓴 사경이다. 삼국시대에는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목간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중국의 능묘제도가 받아들여진 이후에는 개인의 업적을 칭송한 묘지비나 사리탑비 등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불교가 국교로 받아들어진 삼국시대 후기 이후는 문자기록이 남겨진 불상, 사리기, 금고, 종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들이 전해오고 있다.
사상, 종교와 문자
다채로운 종교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바램과 생각이 문자로 표기되었다. 신에게 길흉화복을 묻고 부처님에게 소원을 기도하였다. 신에 대한 사람들의 바램으로 나무 인형이나 작은 나무조각에 주문을 쓰기도 하였으며, 바다 용왕에 대한 신앙이 독실하여 궁중에는 용왕에게 제사지내는 기구가 있을 정도였다. 불교가 융성하게 발전하여 생활에 뿌리내리면서, 사리기, 불상, 금고, 종 등에 죽은이의 명복을 빌고 산자들의 소원을 담은 마음 속 신앙의 글들이 새겨지게 되었다. 또 신앙의 표현이자 수행의 일환으로 여러 형태의 불교 경전이 공들여 만들어졌다. 또 돌아가신 국왕이나 지역 사회의 사상적 지도자인 선사들과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대형 능묘비가 건립되었다. 이 같은 종교적 노력은 문자발전에 공헌하였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제작은 목판인쇄술 발전을 이끌었다. 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의 사경에는 여러 지방의 지식인들이 직접 참여하였다. 선사들의 능묘비 제작을 통해서는 그 새대 이름난 문장가와 명필이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1. 글을 쓴 주술용 나무인형(경남 창녕), 2. 장승모양목제품 (경주 안압지), 3. 부적목간과 항아리(창녕 화왕산성)
4. 용왕에게 제사지낸 기록 목간(경주), 불교가 받아들여지기 이전의 신앙이나 이후의 민간신앙 형태를 보여주는 기록담겨 있는 목간들이다.
1. 글씨 쓴 남근 모양 목간(부여 능산리 사지), 2. 목제남근(경주 안압지). 민간신앙 중 하나인 남근 숭배를 표현하는 유물이다.
1. '신심용왕' 새김 토기, 2. '본궁신심' 먹글씨 접시,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불교가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바다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용왕에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무령왕릉의 왕비지석, 국보 163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2매의 지석 중 왕비지석이다.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매지권을 표시하고 있다. 도교가 번창했던 남조와 백제의 교류관계와 신앙세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무열왕릉비 조각, 660년대
흥덕왕릉비 조각, 898년, 경주 흥덕왕릉
'건녕2년'새김 묘지, 895년
서당스님의 비석(서당화상비), 이 비를 세운 설충업은 원효의 손자이며, 설총의 아들이다.
1. '연가7년'새김 금동여래, 국보 119호, 고구려, 경남의령
2. '정지원'새김 부처, 보물 196호, 부여 부소산성,
'연가 7년'새김 금동여래상은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당시 불상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명문에 적혀 있는 내용은 "연가 7년인 기미년에 고려국 낙량동사의 주지 경과 그 제자인 승 연을 비롯한 사제 40인이 현겁의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는 바, 제 29번째 인현의불은 비구 법영이 공양한 것이다."이다. '정지원'새김 불상은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부인을 위해 시주한 불상으로 그 뒷면에 "정지원이 죽은 아내 조사를 위하여 금상을 만드니, 빨리 삼도를 떠나게 해주소서."라고 적혀 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光背)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 보물 196호
하나의 광배에 불상·보살상을 함께 주조한 삼존불(三尊佛)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배(光背)의 뒷면에는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오른 모습으로 눈·코·입의 윤곽이 큼직해서 시원해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U자형의 주름을 지으면서 묵중하게 흘러내렸는데, 양 팔에 걸친 옷자락은 새의 날개깃처럼 양 옆으로 길게 뻗쳐있다. 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끝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의 양쪽 끝에는 합장하고 있는 두 협시보살이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수법이며 길게 날리고 있는 옷자락은 광배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얼굴만 남아 있고 신체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머리광배 위에는 연꽃속에 앉아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조각양식이나 표현 수법이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 북위시대에 유행한 불상양식을 수용한 것이다.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이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과 같은 양식에 속하지만 그보다 조각수법이 약간 떨어지고 무늬가 간략화 되었으며 조형적인 탄력도 많이 감소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절을 세운 기록, 황룡사 찰주본기, 872년
1. 감산사의 아미타불을 만든 기록 탁본, 720년
2. 염거화상탑의 기록, 844년, 원주 흥법사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26호, 8세기중엽
현존하는 최고의 목판인쇄본으로, 경주 불국사 석가탑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이 경전에는7세기말 당의 측천무후가 만든 측천 문자를 사용하였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죄를 씻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다라니(일종의 주문)를 외우고 작은 탑을 만들어 경전을 그 속에 모셔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측천문자:689년 당 측천무후가 만들어 반포한 문자로, 한자의 일부 글자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많이 쓰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먹으로 쓴 화엄경(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복제품), 국보 196호, 755년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寫經:경문을 쓰고 그림을 그려 장엄하게 꾸민 불경)으로 두루마리 형태이며 크기는 세로 29㎝, 가로 1390.6㎝이다.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연기법사가 간행을 시작하여 다음해인 755년에 완성한 것으로, 사경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19명의 사람에 대해 자세히 적고, 사경 제작방법과 그에 따른 의식절차를 적은 간행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사경이 신라시대부터 경전신앙의 차원에서 성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두식 표현의 문장 역시 이 사경의 특색이다. 책머리에는 금색으로 불경의 내용을 요약해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있고, 신장상·불보살·꽃·풀 등이 그려진 표지에 해당하는 그림이 있다. 본래 1장이던 그림이 2조각 났지만 신라시대의 유일한 회화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법사가 간행한 것이다. 신라 화엄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신라시대 문헌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당시 불교 뿐 아니라 서지학·미술사 등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크다. <출처:문화재청>
1. 목간,
2. '숙세'같은 불교풍 용어로 지은 노래목간
3. 불교경전을 쓸때 사용했던 자 (복제품), 8~9세기, 일본
4. '함통6년'새김 쇠북, 865년,
1. 민애대왕석탑 사리그릇, 보물741호,863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2. '원화10년'새김 뼈단지, 815년, 경주 민애왕릉
사리병과 안에서 나온 법어불경, 김천 갈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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