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로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김장생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1660년(현종1)에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보물로 지정된 강당 건물인 응도당이 출입문 왼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입문 정면에 강학공간인 또다른 강당인 양성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양성당 왼쪽편에 장판각과 정의당이, 오른편에는 고직사가 배치되어 있고 뒷편에 사당인 유경사를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사당에는 김장생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김집,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 돈암서원은 인근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지대가 낮고 홍수때 물이 잠기는 경우가 많아 강당인 응도당만 남겨두고 고종 18년(1881)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인근 수백m내에 김장생의 세거지인 연산 오정리마을과 김장생 일가의 무덤, 재실, 사당 들이 모여 있다. 김장생을 모시는 서원은 전국에 여러군데 있으나, 이 곳 돈암서원이 김장생을 대표하는 서원이라 할 수 있다.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율곡 이이의 제자로 그를 모시는 파주 자원서원에도 함께 모셔진 인물이며, 조선후기 주도세력이었던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노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과거에 등과하지 않고, 학문적인 활동을 주로 했으며 그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받아 천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으며, 임진왜란때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주력하였다. 광해군대에 인목대비 폐모논의 속에서 낙향하여 후진 양성과 예약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세력이 집권함에 따라 서인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역할을 했다. 그의 제자로는 대표적인 서인의 예학자인 그의 아들 김집과, 송시열이 있으며, 그를 따르는 많은 인사들이 조선후기를 이끌어온 주도세력인 노론을 형성했다고도 할 수 있다.
기호지장을 대표하는 돈암서원은 강당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앞쪽에, 김장생을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우를 뒷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돈암서원은 원래의 위치에서 고종17년(1880)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강당인 응도당을 제외하고는 서원을 옮길때 신축에 가까울 정도로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돈암서원을 대표하는 건물인 강당으로 사용하던 보물 1569호로 지정된 응도당이다. 이 건물은 돈암서원이 18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길때 옛 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겼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의 강당건물이다.
돈암서원 출입문인 솟을대문 사액 현판이 걸려 있다.
돈암서원 현판. 현종 원년(1660)에 사액 받았다고 한다.
출입문 앞에는 앞면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아마도 최근에 이 곳을 정비하면서 새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돈암서원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중심건물이 되는 강당건물과 서원 원정비를 볼 수 있다. 강당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양성당이라고 불린다. 이 곳으로 서원을 옮길 때 원래 강당으로 사용했던 응도당 건물대신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넓은 마루로 이루어진 응도당과는 달리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양성당 현판과 주련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앞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들이다.
강당 앞에 세워진 돈암서원 원정비.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고 한다.
돈암서원 원정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조선시대 중기 문인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하생들이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사계와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비이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방형의 비 받침대에 대리석 비석과 비 머리가 서 있다. 이들은 예학과 성리학의 대가로 고향에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는데, 비문에는 장중하고 온화한 사계와 치밀한 신독재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현종 10년(1869)에 세웠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가 썼다. 이 서원은 숲말에 있던 것을 홍수때 물이 차므로 고종 17년(1880)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는데, 그때 비석도 옮겨왔다. 현재의 건물들은 비문에 적혀 있는 건물 배치와 다르다. <출처:논산시청>
서원 뒷편에는 김장생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김집, 제자들로 조선후기 노론을 이끌었던 송시열과 송준길을 모시고 있다.
숭례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당 담장
사당 앞쪽에 있는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전사청. 현재는 수리중이다.
강당 왼편에 위치한 돈암서원이 소장한 목판을 보관하던 건물인 장판각.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판문을 달아 놓았다.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회가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 성격의 건물인 정회당. 가운데 온돌방을 중심으로 삼면에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서당과 정자의 기능을 겸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강당인 응도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다. 서원에서 유생들이 공부하던 공간으로 다른 서원에 비해서 강당건물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답게 지역을 대표하는 유림들이 회합을 갖기에 좋은 건물 구조를 하고 있다. 조선후기를 이끌었던 노론세력의 대표서원다운 규모라 할 수 있다.
강당 내부는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많은 사람이 모여서 회합을 가질 수 있도록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다.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직사 건물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마당에서 본 솟을대문. 문간채를 같이 두고 있다.
논산 돈암서원 전경
서원 마당에 심어진 사당을 상징하는 향나무와 조선시대 선비들이 좋아했던 베롱나무
논산 돈암서원 전경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 사적383호), 논산시 연산면 임리
서원은 선현을 봉사하는 사우와 유생들을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된 사학을 말한다. 돈암서원은 1634(인조12)에 이곳에서 서북상으로 1.5km 떨어진 숲말에 건립되었으며,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다. 1880년(고종17)에 서원이 있던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있자 현재의 이곳으로 옮겼다. 1866년(고종3) 서원 철폐령 이후에도 존속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 있는 곳이다. 이 서원은 기호사림의 종장인 김장생을 주향하고, 그의 제자로 문묘에 제향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따라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은 물론 기호지방 전체에서 존숭 받았던 서원이다. 돈암서원의 주요 건물배치를 살펴보면, 입구에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고 최근에 건립된 서원비가 세워져 있으며, 외삼문, 유생들이 공부하던 응도당, 2기의 서원비, 거경재라 불리기도 하는 양성당, 내삼문, 사우가 배치되어 있다. 이 외에 김장생의 부친인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인 정회당, 유생들의 기숙처였던 정의재, 황강실기.사계유고.신독재유고 등의 목판이 보존되어 있는 장판각 그리고 전사청 등이 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강경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출처:논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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