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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강화 정족산사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던 곳

younghwan 2012. 3. 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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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史庫)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과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이나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고려는 개국 직후부터 사관을 두고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고 고종대인 1227년부터는 개경 이외에 한부를 해인사에 보관하였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개경의 사고는 한양으로 옮겨 춘추관으로 개칭하고, 충주에서 실록보관소를 두었다. 세종대에는 사고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별도의 사고를 설치하여 충주와 함꼐 3대사고를 두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자 고려의 전례를 참조하여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의 4곳에 두었다. 청나라의 위협이 증대했던 인조대에는 묘향산 사고를 강화 정족산으로 옮겼다. 이는 실록 등 중요한 자료를 지방에 분산배치함으로써 안전을 꾀하였다. 이들 사고에 보관하던 자료들은 1908년부터 규장각 관할하에 두어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정족산성 내에 설치된 정족산사고는 조선후기 최종적으로 설치된 4대 사고 중 하나로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지 않았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사고본을 인조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관하던 곳이다. 정족산 사고에는 또한 선원보각을 두어 왕실으로 족보인 선원보를 같이 보관했다. 전국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정족산사고 또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큰 전투가 있어 강화유수부에 보관하던 외규장각 도서와 같은 위험에 처할뻔 하기도 했다. 정족산성내에 있는 전등사는 사찰의 기능도 있지만, 오대산 월정사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지키고 관리하던 승병의 역할도 수행했던 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강화 정족산성내 전등사 뒷편에 위치한 정족산사고. 조선시대 사고 중 제일 중요한 곳이지만, 건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건물은 훼손되고 그 터만 남았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족산사고 출입문.


환기를 위해서 누정의 형태로 지어진 전주사고와는 달리 정족산사고는 창고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4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서적이나 문서를 보관하는 건물 중에는 큰 편이라 할 수 이다.


장서각 출입문. 이 건물에는 환기를 위해 많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 실록(복제본)과 이 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의궤(명성황후 산릉조성의궤). 정족산사고에는 원본이라고 할 수 임진왜란때 살아남은 전주사고본 실록과 의궤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실록은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의궤는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으로 남겨놓은 자료이다.


정족산사고에는 실록을 보관하던 장서각과 별도로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을 두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규모로 그리 크지 않다.


선원보각에서 보관하던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


정족산사고 앞에는 관원들이 근무하던 관리소 형태의 건물이 있다. 원래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전등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보인다.


전등사에서 정족산 사고로 올라가는 길


정족산 사고로 올라가는 길 옆쪽에는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 궁궐을 건립하고자 지었던 가궐의 건물터가 있다.

정족산 가궐지,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해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 터이다. 당시 백승현이 낭장으로 있을 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 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를 요구했을 때 가구러을 짓고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를 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진언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당시 이 가궐에는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 두었다고 한다. <출처:강화군청>


정족산 사고로 올라가는 길. 뒷쪽으로는 서문을 통해 선두보와 연결된다.


사고에서 전등사 뒷편으로 올라가는 길. 정족산성 북문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정족산성을 지키며 관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전등사 전경.

정족산 사고,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임진왜란(1592)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 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로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 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권 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출처:강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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