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편에 위치한 송화산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무덤이다. 신라 귀족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왕릉에 준하는 규모의 큰 무덤으로 지름 30m 크기로 둥근 형태의 봉분을 하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둘레석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고 있는데 세련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 앞에는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서구의 제단과 비슷한 형태의 상석이 놓여져 있다. 무덤의 전체적인 형태는 김유신장군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태종무열왕릉과 달리 성덕왕 이후 왕릉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후대에 보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덤의 봉분은 후대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였던 왕릉과 비슷하지만,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상들은 세워져 있지 않으며, 봉분 앞에는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2기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문무왕이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 경주부윤이 세운 신도비 형태의 비석이 남아 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왕인 구해왕의 증손이며,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금관가야가 멸망하면서 투항했던 금관가야 지배층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김유신이 충청도 진천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볼 때 진천지역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진흥왕과 진평왕대에 김유신 일가는 삼국간의 충돌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유신은 선덕왕대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군을 토벌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많은 성을 빼앗는 등 당대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여동생이 후에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결혼하여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과 그의 동생 김인문을 낳는 등 일개 귀족세력에서 신라왕실의 주축세력이 되었다. 선덕여왕대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대까지 오랜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김유신 장군관 관련된 유적으로는 충북 진천에 출생지가 있으며, 경주에는 그가 살았던 집터인 재매정, 기생 천관녀와 관련된 유적인 천관사지, 그를 모신 서원인 서악서원 등이 있다.
경주 도심 서쪽을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 서안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장군묘이다. 사적 21호로 지정된 이 무덤은 봉분에 둘레석을 두르고 주위에 난간을 세우고, 정면에는 서구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의 상석이 놓여 있는 통일신라 전성기 왕릉의 형식을 하고 있다.
경주 김유신장군 무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주변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은 70년대에 정비한 것으로 보이며, 경주 특유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신라 왕릉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책로를 들어가는 길 끝에 보이기 시작하는 김유신 장군 무덤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는 김유신 장군 무덤. 우리나라 최대의 성씨를 이루고 있는 김해김씨는 사실상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삼국통일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통해 주류세력에 편입됨으로써 오늘날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적 21호로 지정된 김유신장군 무덤의 봉분
무덤 앞에 세워진 상석. 후대의 무덤에서는 볼 수 없는 형식으로 통일신라 전성기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였던 왕릉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형식이다.
무덤앞에 세워진 비석, 대체로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봉분 둘레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을 새긴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부조를 깊게 새기지는 않았으나, 세밀하게 잘 새겨진 부조상으로 우리나라 십이지신상을 대표하는 부조상이라 할 수 있다.
둘레석 바깥에 세워진 난간석
둘레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중 쥐(子),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
무덤으로 들어오는 길
조선시대 경주부윤이 세웠다는 신도비에 해당하는 비석
용과 구름이 새겨진 비석 머릿돌
비석에 새겨진 글씨
김유신장군묘, 사적 21호, 경주시 충효동
이 무덤에는 김유신(595~673) 장군이 모셔져 있다. 충효동 송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에 위치해 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모양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7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병합하였고,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으며,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당나라 군사도 물리쳤다. 문무왕 때에는 태대각간이라는 관작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능의 밑둘레가 50m, 지름이 18m, 높이는 5.3m인데 아래쪽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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