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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230호), 목은 이색이 대장경을 인쇄하고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적은 비석

younghwan 2013. 4. 1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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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신륵사 경내 동쪽편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남아 있는 비석인 보물 230호로 지정된 '신륵사 대장각기비'이다. 이 비석은 고려말 유학자이자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던 대표적인 충신이었던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인쇄하고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우면서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비석은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위에 대리석에 글씨를 적은 비몸을 세우고 양쪽에 기둥을 댄 다음 그위에 지붕을 놓은 형태로 조선초기 비석의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대장경을 보관하던 대장각은 2층으로 지어진 건물로 아마도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정자처럼 지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쪽에 세워진 다층석탑, 삼층석탑과 함께 신륵사를 대표하는 건물로 이정표 역할을 했던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보물 230호,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이 비는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것이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 관제학인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제학인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위에 비몸을 세우고 양옆에 기둥을 댄 다음 그 위에 지붕도양의 개석을 올렸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기에 나타난 것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비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남한강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었던 신륵사 다층석탑 뒷편에 남아 있는 '신륵사 대장각기비'. 이곳에 목은 이색이 나옹선사와 함께 세웠던 2층건물인 대장각은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비각에 모셔진 비석만 남아 있다.


'대장각기비' 현판


비각안에 모셔진 '대장각기비'.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위에 대장각 건립 내력을 적은 글씨가 새겨진 대리석몸돌과 양쪽의 화강석 기둥,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글자가 새겨진 비석 몸돌

비석에 새겨진 글은 당시 관리였던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비각 앞에 세워져 있는 또다른 비석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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