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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228호)과 석종비(보물229호)

younghwan 2013. 4. 20.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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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는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선사가 마지막으로 입적하면 그의 제자들이 크게 중창한 사찰로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원찰로 크게 번창한 사찰이다.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대표적인 원찰인 양주 회암사와 관련이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의 신륵사는 조선중기 성종대에 크게 중창될 때의 모습이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려인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조사당 뒷편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는 신륵사를 크게 중창시킨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 있다. 나옹선사의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정형화된 목조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 승탑과는 달리 인도의 승탑인 스투파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종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석종형부도'라 불리며 사각형으로 생긴 넓은 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만든 승탑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에는 계단이 놓여 있다. 이러한 형식의 승탑은 고려시대의 장식성이 강한 화려한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승탑들에 영향을 주었다. 나옹선사는 지공.무학대사와 함께 고려말.조선초 3대승려로 추앙을 받았으며, 인도에서 온 승려로 알려진 지공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양주 회암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공민왕의 왕사로 보제존자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다. 말년에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나옹선사의 승탑은 이곳 신륵사에도 있지만, 양주 회암사 절터에도 남아 있다.


고려말 조선초 3대 승려로 추앙받안 지공.나옹.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 뒷편 언덕에는 양주 회암사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선사를 모신 승탑이 있다.


나옹선사의 승탑. 사리를 모신 승탑인 보제존자석종(보물228호), 석종비(보물229호), 석등(보물231호)로 구성되어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보물 228호,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이 석종은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 말기의 승려 나옹(1320~1376)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부도이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 2년(1376)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경남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드이 우왕 5년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 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마련하였다. 부도의 기단 위에 돌을 깔고 기단의 앞면과 양쪽 면에 2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에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그 위에 모셔진 이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평이 되었으며 맨꼭대기에는 보주를 조각하였다. 종모양의 부도는 통도사, 금산사, 용연사, 봉암사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탑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종모양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부도 뒷편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229호)의 내용에 의해 이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 5년(1379)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여주군청>



나옹선사 승탑은 공민왕이 내리 시호인 '보제존자'라는 이름을 붙여 보제존자석종으로 불린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정형화된 형태인 목조건물형태의 승탑과는 그 형태를 달리하며 인도의 승탑인 스투파와 비슷한 형태로 종처럼 생겼다고 하여 석종형부도라 한다. 고려말 이후 승려의 승탑은 그 형태가 간략화되면서 이와같은 석종형 부도가 많이 만들어졌다.


승탑은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은 넓은 기단 위에 종모양을 하고 있는 승탑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에는 계단을 설치해 놓고 있다. 이와같은 승탑은 양산 통도사와 김제 금산사 사리탑에서 비슷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승탑의 몸돌은 종처럼 생겼으며 표면에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고 있으며 탑꼭대기에는 보주를 얹혀 놓고 있다.


2009년 봄


불교의 전파경로에 위치한 서역인 중군 둔황의 사막에 남아 있는 승려의 승탑. 인도의 스투파처럼 그릇을 엎어놓은 복발형 승탑이 주를 이룬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229호,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이 비는 고려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비문은 이색과 서예가인 한수가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인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을 얹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새로이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230호)도 같은 형식이다. <출처:여주군청>


승탑 뒷편에는 이 승탑을 조성한 내력을 탑비가 세워져 있다. 비는 3단의 받침에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신륵사 대장각기비와 마찬가지로 글씨를 적은 대리석으로 만듬 몸돌 양쪽에 화강암으로 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탑비에 새겨진 글은 당대의 유학자이자 문신인 목은 이색이 글을 짓고 명필인 한수가 글씨를 썼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 앞면(왼쪽)에는 나옹선사 승탑과 조사당을 조성한 내력을 적고 있으며, 뒷면(오른쪽)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자의 명단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부


보제존자 승탑 탑비


2009년 봄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팔각원당형을 이어받고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고 전체 높이는 225cm이다. 원래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서 196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리를 봉안한 사리함이 발견되었지만 어떤 스님의 탑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탑을 의미한다. 이 부도는 팔각의 집모양을 받치는 3단형의 기단부와 팔각 집모양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과 일조로 구성된 팔각의 하대석에는 8개의 연꽃잎 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고, 매우 낮은 원통형의 중대석은 문양이 없으며, 팔각의 상대석은 위로 향한 연꽃잎 무늬가 돋을새김해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팔각형태로 문을 새기고 범자를 돋을새김하였다. 지붕을 나타내는 옥개석은 기와골 끝에 꽃장식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육중하면서도 세련되며 간결한 기풍을 풍기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여주군청>


신륵사 조사당 뒷편에 있는 승탑. '팔각원당형석조부도'라 불리며 원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며, 승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이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탑의 형태가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어 원구형부도라고 불리운다. 현재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탑인지 알 수 없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220cm이고, 공모양의 탑신은 60cm로, 당시 조성되었던 부도들과 비슷하다. 이 부도는 크게 위부터 상륜부와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그리고 원형 모양의 탑신이 하나의 돌, 그리고 기단부는 세개의 돌로 쌓았다. 아래쪽의 기단부는 일반적을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실되어 있다. 연꽃잎으로 장식된 상대석과 팔각의 돌 위에 각 모서리를 작은 원형의 연주문으로 장식한 중대석, 그리고 사각형의 지대석만 남아 있다. 상륜부는 연주문을 받침으로 한 세층의 보주형으로 장식했으며, 탑신 위의 옥기석 부분은 기와골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새기는 등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신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당시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출처:여주군청>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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