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고양 북한산 태고사 원증국사 승탑(보물 749호)과 탑비(보물 611호)

younghwan 2013. 5. 3. 13:30
반응형


 북한산성 계곡에서 중심이 되는 행궁터 아래에 위치한 태고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승탑과 탑비가  있다. 승탑의 주인은 고려말.조선초에 중흥사 머물면서 공민왕의 왕사를 지내는 등 큰 영향을 미쳤던 승려 보우이다. 그는 어린나이에 양주 회암사에 출가하여 여러 사찰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중국에 유학을 하기도 하였다. 공민왕때 신돈의 뒤를 이어 왕사가 되었으며, 고려 우왕때 이곳 태고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태고사는 원래 원증국사가 머물렀던 중흥사에 딸린 작은 암자로 지금도 불전과 요사채를 갖춘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것을 복구한 것이라고 한다. 원증국사가 머물렀던 사찰은 태고사 아래쪽에 위치한 중흥사로 고려말에 크게 중수하였다고 하며, 병자호란 이후 북한산성이 축조.보강되면서 승병들이 머무는 사찰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중흥사는 일제강점기에 큰 홍수로 파괴된 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다.


원증국사 승탑

 태고사 뒷편 언덕에는 원증국사 사리를 모신 보물 749호로 지정된 승탑이 북한산 봉우리와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승탑은 3단으로 된 기단위에 탑신을 올린 후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은 형태이다. 기단은 각면마다 기둥모양과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꽃무늬가 새겨진 8각의 가운데 받침돌과 원형에 가까운 윗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의 몸돌은 원형에으로 뒤어 있으며 그 위에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올려 놓고 있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보물749호,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고려 후기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1301~1382)의 사리탑이다. 보우의 법호는 태고이며, 왕사.국사를 거쳐 82세로 입적하자 이곳에 사리탑을 세우고 탑 이름을 '보월승공'이라 하여 영골을 모셨다. 사리는 이곳만이 아니라 양산사.사나사.청송사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이에 보우의 또 다른 사리탑이 경기도 양평의 사나사에 있어 경기도 유형문화재 72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원증국사탑의 형태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로 탑신을 올린 후 독특한 모습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원형의 탑신 몸돌은 위쪽으로 좁아져서 지붕돌 밑면에 들어맞게 되어 있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보물 611호)의 건립이 1385년(우왕11)이므로 이 사리탑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고양시청>


북한산성 내에 있는 작은 사찰인 태고사 뒷편 양지바른 언덕에 모셔진 고려말 고승 보우의 사리를 모신 원증국사탑.


각면에 기둥모양에 새겨진 4각형의 기단부 아래받침돌


8각형을 하고 있는 가운데 받침돌과 원형에 가까운 윗받침돌. 가운데 받침돌에는 각면에 꽃무늬와 기중모양을,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고 있다.


둥근 구형에 가까운 몸돌


지붕돌과 머리장식


태고사 뒷편 원증국사 승탑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절 뒷편 양지바른 언덕에 모셔진 승탑


원래 승탑과 그것을 모방해서 만든 복제 승탑이 그 앞에 놓여져 있다.


태고사 원증국사승탑


승탑이 있는 언덕에서 보이는 북한산 봉우리


앞쪽으로는 북한산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승탑과 달리 사찰 경내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리돌을 세운 전형적인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글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이 짓고, 명필이었던 권주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조각기술이 발달했던 통일신라나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비석과는 달리 표현이 사실적이지 않고 조각수법 또한 많은 떨어지는 편이다. 정형화된 고려말 비석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보물 611호
중흥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이곳 태고사를 창건하여 5년간 머물렀던 원증국사 보우의 행적과 업적을 새긴 탑비이다.  원증국사(1301~138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호는 태고이다. 13세에 회암사로 출가하여 26세에 화엄선에 합격하였다. 1346년(충목왕2)에 원나라에 가서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의 법손 청공 밑에서 공부하고 그 법을 받아 귀국했다. 그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으며, 한때 신돈과 대립하다가 속리산에 금고되기도 했으나 신돈이 죽은 후 국사가 되었다. 그를 따르는 승려가 1,000여 명에 이르고, 당대의 대신이었던 최영과 이성계가 그의 제자로 비문에 적혀 있을 정도로 고려말기 불교계의 거목이었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과 함께 한국불교의 초석을 다진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증국사탑비는 1385년(고려 우왕11)에 건립되었다. 당대의 문장가 이색이 비문을 짓고, 명필인 권주가 글씨를 썼다. 전체적으로 보아 탑비의 조각이 형식에 그치고 있어 퇴화된 느낌을 준다. <출처:고양시청>


사찰 뒷편 비각에 모셔진 원증국사탑비이다. 남향을 하고 있는 사찰과는 달리 비석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릿돌을 세운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0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거북받침돌. 조각수법이 다른 비석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맨 위에 '원증국사탑비'라고 적힌 몸돌. 글씨를 새겨놓는 수법은 빼어나지 못하는 글씨 자체는 당대 명필이 쓴 글시로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