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전석탑(模塼石塔)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석탑이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삼국시대에 중국 산동지방의 영향을 받아 전탑을 모방하여 구운벽돌 대신 돌을 벽돌모양을 다듬어 쌓은 탑았다. 목탑의 모방하여 쌓은 쌓은 백제의 석탑과 대비되는 부분은 신라를 중심으로 유행한 석탑 형태이다. 전탑과 함께 한강유역을 통해 신라의 수도 경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 주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통일신라에는 백제 석탑을 영향을 받아 석재를 목재처럼 가공하여 쌓는 석탑의 양식이 섞여 있는 모전석탑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후에도 벽돌모양으로 쌓은 초기 형태의 모전석탑은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기존 모전석탑의 해체, 수리 등을 통해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
초기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가공하여 쌓은 석탑으로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전탑의 외형과 건축양식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안산암을 사용했으며, 지붕을 간략하게 표현한 전탑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벽돌을 구울 수 있는 기술이 있었음에도 돌을 사용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와 견고함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인 분황사 모전석탑(국보)를 비롯하여 영양 산해리 모전오층석탑(국보), 제천 장락리 칠층모선석탑(보물),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국보) 등이 있다. 남한강으로 통해 죽령을 거쳐 경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은 삼국시대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것으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7세기 신라의 조각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탑신은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층만 남아 있다.
수리과정에서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발견되었다.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공양물들이 있었는데 그중 바늘.가위.집게 등은 분황사 창건을 발원했던 선덕여왕과 관련을 짓기도 한다. 또한 석탑안에는 북제 동전인 상평오수전과 북송 동전인 송녕중보가 같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도 석탑을 해체.수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양 산해리 모전오층석탑(국보)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은 안동으로 흐르는 강변 절터에 세워져 있다. 높이 9m의 큰 석탑으로 흙과 돌을 섞어 낮게 쌓은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두었는데, 화강석으로 만든 기둥과 이맛돌이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과 마찬가지로 아래와 위에 계단모양을 층을 두고 있다.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균형이 잡혀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세부적인 축조방식도 뛰어난 모전석탑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1층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만들었으며, 2층 기단은 10여개의 큰 돌로 만들었다. 탑신 1층 몸돌은 높게 만들었으며 가운데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다.
2층부터는 몸돌 중간에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보물)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보물)은 전탑과 외형이 거의 흡사하다. 탑의 높이는 9.1 m이며, 감실이 있는 1층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층단을 갖춘 전형적인 전탑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석탑의 형태나 제작 수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국보)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국보)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아 올린 칠층 모전석탑이다. 화강암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탑신을 받치기 위해 받침을 올려 놓았다. 탑신은 석회암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아 올렸다. 탑신 1층 몸돌에는 불상을 안치하는 감실을 두고 있다. 탑 앞에 있는 연꽃무늬, 안상(眼象) 등이 새겨진 배례석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1972년 해체.복원할 때 탑의 내력을 적은 탑지석과 금.은.동으로 만든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석탑 양식이 반영된 모전석탑
목탑을 모방한 석탑의 양식이 반영된 모전석탑이 통일신라 때 조성되었다. 가구식으로 짜맞추어 쌓은 목조건축 양식과 벽돌로 쌓은 전탑 양식이 섞여 있다. 탑신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생략하고 잘 다듬은 큰 석재를 벽돌처럼 쌓았으며 지붕돌에는 전탑처럼 층단을 표시하고 있다. 안동, 의성, 구미, 경주 등 죽령을 통해 경주로 연결되는 교통로 주변과 경주 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모전석탑이 남아 있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국보),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등이 있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은 벽돌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은 전탑양식과 가구식으로 짜맞추어 쌓은 목조건축의 양식이 같이 사용하여 신라 석탑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1층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높이 9.6 m의 오층석탑이다. 기단은 1층으로 낮게 만들어 안정감을 주고 있는데 면석의 각면에 기둥을 세운 것은 목조건축물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반면 지붕돌 윗면에 계단처럼 층을 만든 부분에서 전탑을 모방하여 만든 모전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탑이나 모전석탑처럼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두고 있다. 통일신라 초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 중 분황사 석탑 다음으로 오래되었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국보)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국보)은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는데 높이가 10 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오층석탑이다. 통일신라 때 세워진 다른 석탑과는 달리 100여개가 넘는 석재를 짜서 만들었다. 지붕돌 아래.윗면을 계단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몸돌에는 기둥조각을 새겨놓지 않아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 계열로 보여진다. 탑신부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셨던 감실이 있으며, 그 주위에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각 구성요소의 비례도 우수하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은 크게 가공한 돌을 쌓은 모전석탑이다. 기단부는 8개의 잘 다듬은 화강석을 2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1층 몸돌에는 문짝을 새겨 감실을 표현하였다. 문의 양쪽에는 인왕상이 새겨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 않으며 지붕돌을 크게 만들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석탑 제작기술이 퇴보되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동탑
경주 남산동 동.서삼층 석탑(보물)은 형식이 다른 2개의 석탑이다. 그중 동탑은 모전석탑 형식이 남아 있는 특이한 형태이며, 서탑은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동탑은 기단부가 3칸의 큰 육면체돌을 벽돌처럼 쌓아서 만들었다. 탑신부는 기존 석탑처럼 몸돌과 지붕돌을 간략하게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문화유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계 석탑, 중국 목탑을 모방해서 쌓은 석탑 (0) | 2021.10.27 |
---|---|
목탑(木塔), 중국 누각의 형태로 지어진 탑 (0) | 2021.10.22 |
전탑(塼塔), 벽돌로 지은 탑 (0) | 2021.10.06 |
불교 석굴사원(石窟寺院) (0) | 2021.07.09 |
백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창건된 부여와 익산의 사찰들 (0) | 2021.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