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탑(木塔)은 인도의 복팔형 탑파(塔婆)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 전통의 누각(樓閣) 형태로 변형되어 발달하였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는 사찰을 세울 때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고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국의 가림배치가 받아들여 삼국은 각각 고유의 가람배치를 형성하게 되었다.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목탑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다 소실되고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백제의 목탑지는 부여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신라의 목탑지는 경주 황룡사지, 고구려의 목탑지로는 평양 청암리사지에 남아 있는 목탑지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목탑들은 화재나 전란 등으로 소실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조선후기(17세기초)에 건축된 법주사 팔상전(八相殿)이 한국 목탑을 대표하는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중국의 누각(樓閣)
누각(樓閣)은 조망을 위해 여러 층으로 지은 동아시아 목조건축물이다. 중국 고대 상나라에서는 중옥(重屋)이라 하여 하늘과 통하는 것이라 믿어졌다. 춘추전국시대 제들은 높은 누대(樓臺)를 지어 세력을 과시했다. 궁궐(宮闕)에서 궐(闕)은 궁궐 정문 양쪽에 세워진 높은 누각을 말하며 왕권을 상징한다. 목탑처럼 높게 짓는 누각은 한나라 때 도가(道家)가 성행하면서 등장한다. 당시 신선들은 누각을 좋아한다고 믿었으며 사람도 신선이 되어 누각에서 영생할 수 있는 믿었으며 무덤의 껴묻거리로 도루(陶樓)를 만들어 묻었으며 오늘날 발굴된 도루에서 당시 누각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나라 때 이런 신앙적인 배경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시는 탑에 누각의 형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영녕사(永寧寺)
영녕사는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洛陽)에 있었던 대표적인 사찰이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따르면 탑은 519년 준공되어 534년 낙뢰로 소실되었다. 영녕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가면서 남향한 중심축선 위에 남문, 9층목탑, 불전, 강당 등의 건물을 순서에 따라 일직선으로 배치된, 남북시대의 대표적 1탑1금당식 가람배치이다. 9층으로 세워진 영녕사 목탑은 높이 147 m로 당대 최고 높이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 ~ 554년)은 사비로 천도하면서 정림사를 세웠는데 당시 북위 최고의 사찰이었던 영녕사를 참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국가 주도로 세워진 사찰의 가람배치와 목탑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목탑
백제는 뛰어난 건축기술을 바탕으로 거대한 목탑을 지었으며 그 흔적이 미륵사지 등 여러 절터에 남아 있다. 또한 백제 목탑을 모방해서 만든 미륵사지 석탑과 일본의 목탑에서 그 규모와 형상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목탑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기단부 등의 흔적과 주변 출토유물을 통해 그 규모와 뛰어난 기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 백제 목탑지로는 부여 군수리사지, 금강사지, 능산리사지, 부소산성 서복사지, 용정리사지, 왕흥사지, 익산 미륵사지 등이 확인되었다.
부여 백제문화단지에는 능산리사지 절터 가람배치를 기준으로 백제 사찰을 복원해 놓고 있다. 중문, 목탑, 금당이 일렬된 배치된 백제 사찰을 모습을 살펴볼 수있다. 목탑터를 기준으로 목탑을 재현했는데 백제 목탑 양식이 남아 있는 일본 목탑과 비슷하다.
능산리 사지는 능산리고분군과 사비성을 둘러싸고 있던 부여나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대체로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원 원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탑터 심초석에서 출토된 사리감에는 창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했다는 내용의 글씨가 적혀 있다.
부여 왕흥사지(사적)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세운 대표적인 사찰로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전형적인 1탑 1금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목탑터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부여 군수리사지(사적)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백제 절터 중 최초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축으로 일직선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목탑터 심초석 부근에서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330호)와 석조여래좌상(보물329호)가 출토되었다.
신라의 목탑
신라는 선덕여왕 때 백제 기술자 아비지(阿非知)를 초정하여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레서 유학한 자장의 권유로 지었다고 한다. 목탑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램으로 지었는데 9층은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적국을 상징하고 있다. 황룡사 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목탑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찰주본기에 적힌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목탑은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로 현재 기준으로 30층 정도의 높이라 한다. 찰주본기에 따르면 경문왕 13년(873)에 크게 중건된 것으로 비롯하여 몽고군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릴때까지 여섯차례에 걸쳐서 중수되었다고 한다.
목탑건물터에서는 찰주본기가 적혀 있는 사리함을 비롯하여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묻은 지진구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금.은 등 칠보와 거울.칼 등 다양한 형태의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찰주본기는 심초석 사리구멍 안에 있던 사라갖춤 중 내함에 해당하는 것으로 1964년에 도굴된 것을 되찾았다고 한다. 4개의 금동판으로 되어 있는데 탑을 조성한 경위와 871년에 중수한 내용을 새겨놓고 있다. 구층목탑을 세운 경위는 삼국유사와 큰 차이가 없으며, 삼국유사의 신빙을 더해 주는 유물이다.
황룡사에 목탑을 세우기 전에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묻은 지진구들이 출토되었다. 가위,칼,팔찌,방울,허리띠 장식 등 일상생활용품들을 묻고 있다.
사천왕사는 경주에서 7곳의 신선한 숲 중 하나인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사천왕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그 앞에 2개의 목탑이 조성된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감은사,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조성되었던 쌍탑식 가람배치를 처음 시도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때에는 석탑이 보편화되면서 사찰에는 석탑이 많이 세워졌지만 대형 사찰을 중심으로 목탑도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불교 종파 중 법상종(法相宗)은 불경을 중시했던 중국 시안 대자은사처럼 불경을 모시기 위한 큰 규모의 목탑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법주사 팔상전이나 금산사 대장전처럼 옛 목탑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며 선종계열 사찰이었던 남원 실상사에도 목탑터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이후
고려시대 이후 황룡사 구층목탑처럼 기존 목탑을 중건하며 유지하였으며 남원 만복사지에는 상당기 큰 규모의 목탑이 세로 세워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법상종 중심사찰이었던 법주사에 팔상전이 중건되었으며, 금산사에 있던 목탑은 불경을 모시는 대장전이라는 불전으로 바뀌어 그 명맥이 이어졌다. 또한 목탑형식을 하고 있는 쌍봉사 대웅전도 목탑을 계승하는 불전이다.
법주사 팔상전(국보)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으로 5층 목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은 1층 기준으로 앞면 5칸, 옆면 5칸의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4면에 돌계단이 있는 낮은 기단 위에 목탑이 세워져 있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내부에는 사리를 모시는 공간, 팔상도를 모시는 공간, 예불을 드리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금산사 대장전(보물)은 원래 미륵전 앞에 세워져 있던 목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때(1635)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목탑 건물로는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지붕에 목탑이었을 때 사용하였던 부재가 올려져 있으며, 단층으로 변형되었지만 옛 목탑의 건축양식이 일부 남아 있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던 목탑형식의 건물이었다. 현재는 1985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건물이다. 앞면 1칸, 옆면 1칸의 크지 않은 규모의 3층 건물이다.
진천 보탑사 삼층목탑은 목탑을 일부 재현한 것이다. 높이 42.7m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내부 모두 트인 통층구조로 지은 법주사 팔상전과 달리 1층에서 3층까지 나누어져 있으며,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일본의 목탑(木塔)
일본은 그 탑의 양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은 목재 풍부한 자연환경과 빈번한 지진의 탓으로 무너질 위험이 있는 석조보다 목조를 선호하였고, 다각형 평면을 만드는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사각형 평면을 선호하였다. 나라 호류지(法隆寺) 오층목탑과 교토 도지(東寺) 오층목탑이 일본을 대표하는 목탑이다.
도지 오층목탑은 높이 54.8m의 목탑으로 일본에서 최고 높은 규모이다. 9세기말에 처음 세워졌는데 중국 장안 대자은사 대안탑이나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처럼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목탑이다. 현재의 목탑은 1644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기부로 중건되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목탑 양식이 잘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능사 오층목탑은 이 탑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가가와현 젠쓰지(善通寺)는 일본 진언종을 연 홍법대사 구카이(空海)가 태어난 곳으로 고야산, 교토 도지(東寺)와 함께 홍법대사 3대 성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교토 도지와 마찬가지로 오층목탑이 세워져 있다.
이시테지(石手寺)는 일본 마츠야마시에 있는 진언종 사찰로 도고온천에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이곳에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세워진 삼층목탑(三重塔)이 있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처럼 간략화된 목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센소지(浅草寺)는 일본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절로 도쿄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654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에도시대 도쿄가 일본을 중심지가 되면 크게 번창하였다. 1648년에 오층목탑으로 중건되었다가 2차대전 때 도쿄 대공습으로 소실된 후 콘크리이트 건물로 복원되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일본 오층목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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