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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국보 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이후 대부분의 석탑이 이 형태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탑에 낙서를 하는 바람에 소정방이 세운 석탑이라는 오해를 갖고 있었던 석탑으로 그 제작연대가 석탑 중에서는 상당히 이른 편이고, 탑의 크기와 웅장한 자태, 균형미 등이 뛰어난 석탑이다.
감은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당나라 소정방이 세겨 놓았다는 글씨입니다.(?)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측면쪽에서 본 정림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정림사지 본당 건물쪽에서 본 오층석탑입니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 백제와 신라의 미감을 비교해 보세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나요? 훤칠한 키에 당당한 어깨, 단정한 몸가짐에 지적이고 우아함이 물씬 풍겨 나오는 그런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요?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던지며 다가올 것 같아요. 감은사 석탑은 어떤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굳세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 같은, 듬직한 사람을 보는 듯해요. 지붕돌에서 모서리선의 표현 하나만 비교해도 백제인과 신라인의 미감을 알 수 있죠. 정림사지 탑은 얇은 지붕돌의 모서리선(우동)이 내려오다 끝에서 10분의 1쯤 남겨진 지점(전각)을 가볍게 올렸어요. 하지만 감은사 탑의 표현은 달라요. 처마선은 일직선인데 지붕돌의 모서리선이 내려오면서 점차 두툼해져 마치 위로 솟은 듯이 보이게 해요.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문화에 드러나는 거죠. 백제가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면 신라는 지금의 경상도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고대 국가죠. 그래서 두 지역은 말씨에서부터 아리랑, 불상, 장승 등 모든 문화에 차이가 있죠. 우선 전라도 지방을 볼까요? 전라도는 넓은 평야가 많아 먹거리가 풍부하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도 여유가 있어요. 평야가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산이 적죠. 산줄기의 끝자락이라 산인지 구릉인지도 모를 낮은 산들 뿐이죠. 전라도 말씨나 진도 아리랑을 들어보면 낮은 산을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경상도 지방은 어때요? 앞은 거대한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 뒤는 넓고 깊은 바다와 싸워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의 성격도 투박하고 거칠 수밖에 없죠. 그런 지리적 조건이 말씨를 비롯해 아리랑이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다른 지역도 물론 마찬가지구요. 이렇게 지역의 특성을 알면 그 지역을 이해하듯이 인간관계도 그렇게 풀어나갈 수 있어요 <출처:문화재청>
☞ 정림사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감은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당나라 소정방이 세겨 놓았다는 글씨입니다.(?)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측면쪽에서 본 정림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정림사지 본당 건물쪽에서 본 오층석탑입니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 백제와 신라의 미감을 비교해 보세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나요? 훤칠한 키에 당당한 어깨, 단정한 몸가짐에 지적이고 우아함이 물씬 풍겨 나오는 그런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요?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던지며 다가올 것 같아요. 감은사 석탑은 어떤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굳세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 같은, 듬직한 사람을 보는 듯해요. 지붕돌에서 모서리선의 표현 하나만 비교해도 백제인과 신라인의 미감을 알 수 있죠. 정림사지 탑은 얇은 지붕돌의 모서리선(우동)이 내려오다 끝에서 10분의 1쯤 남겨진 지점(전각)을 가볍게 올렸어요. 하지만 감은사 탑의 표현은 달라요. 처마선은 일직선인데 지붕돌의 모서리선이 내려오면서 점차 두툼해져 마치 위로 솟은 듯이 보이게 해요.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문화에 드러나는 거죠. 백제가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면 신라는 지금의 경상도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고대 국가죠. 그래서 두 지역은 말씨에서부터 아리랑, 불상, 장승 등 모든 문화에 차이가 있죠. 우선 전라도 지방을 볼까요? 전라도는 넓은 평야가 많아 먹거리가 풍부하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도 여유가 있어요. 평야가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산이 적죠. 산줄기의 끝자락이라 산인지 구릉인지도 모를 낮은 산들 뿐이죠. 전라도 말씨나 진도 아리랑을 들어보면 낮은 산을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경상도 지방은 어때요? 앞은 거대한 백두대간이 가로막고 있고 뒤는 넓고 깊은 바다와 싸워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의 성격도 투박하고 거칠 수밖에 없죠. 그런 지리적 조건이 말씨를 비롯해 아리랑이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다른 지역도 물론 마찬가지구요. 이렇게 지역의 특성을 알면 그 지역을 이해하듯이 인간관계도 그렇게 풀어나갈 수 있어요 <출처:문화재청>
☞ 정림사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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