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원래 세종때 상왕인 태종이 거처하기 위해서 처음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는 왕실의 어른인 대비들을 위해서 성종대에 창건된 궁궐이다. 창경궁은 왕의 거처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비를 비롯하여 많은 후궁들과 그들의 소생을 비롯하여 주요 왕실 가족이 거처하던 공간이었다. 창경궁 안쪽 후원과 가까운 곳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통명전과 양화당은 창경궁의 핵심적인 건물로 통명전은 국왕이 거처하는 침전으로, 양화당은 대비가 거처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국왕은 대비의 거처 근처에서 머물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통명전은 대비의 거처인 양화당과 함께 대비가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 기간 등 대비의 위상이 높았을 때, 대왕대비가 존재했을 때, 또는 왕의 생모가 대비가 아닌 경우 등 여러 명의 대비가 존재했을 때 통명전을 대비전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통명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큰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이익공계를 하고 있다. 창경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넓은 월대 위에 건물을 세웠으며, 건물 뒷편 일부를 제외하고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는 여러개의 방을 두고 있다. 통명전 서쪽에는 화강석으로 조성한 작은 연못과 정원을 두고 있다. 대비의 거처인 양화당은 앞면 6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로 좌.우엔 온돌방을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통명전과 양화당
통명전(보물818호)은 1833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위의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의 물길을 돌로 공들여 만든 정원이 있다. 1833년에 중건한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환궁하면서 여기에 거처한 일도 있다. <출처:문화재청>
창경궁 뒷편 후원으로 들어가는 언덕 아래에 위치한 통명전과 양화당. 통명전은 국왕의 침전, 양화당은 대비의 처소로 설명되어 있는데, 2동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건물들은 대비들이 사용했던 건물로 여겨진다. 지금은 주변에 행각이나 건물들이 없지만, 원래 이곳은 통명전과 양화당을 중심으로 후궁들의 처소를 비롯하여 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던 곳으로 오랜 기간 궁궐 생활의 중심이었던 공간이다. 아마도 사람사는 공간을 찾아서 국왕이나 세자 가족이 창경궁을 이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물 818호로 지정된 창경궁의 핵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통명전이다.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국왕의 침전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온돌방이 적고,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대비를 중심으로 왕실가족들이 모이는 장소나 연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은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 양쪽에는 방을 두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이익공이며,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통명전 앞 월대. 국왕이 거처하는 침전으로 지어진 건물로 삼도의 형식에 맞게 월대에 오르는 3개의 계단을 두고 있다.
월대 모서리에 화재를 막지 위한 상징적 의미로 올려 놓은 드므
통명전 문살과 기둥. 정자문살을 사용하고 있으며, 장식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지 않다.
통명전 추녀마루의 잡상
통명전 앞 툇마루
통명전 내부. 가운데 대청마루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양쪽에 방을 두고 있다. 앞.뒤로 툇마루를 두어 잠깐 앉아서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통명전 내부의 방. 미닫이문으로 여러개의 방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통명전 내부 천정
통명전 내부이 현판. 이 건물을 중건한 순조가 직접쓴 글씨라고 한다.
통명전 앞 우물
통명전 뒷마당. 대부분의 궁궐과 마찬가지로 언덕에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양쪽에 굴뚝이 세워져 있다.
통명정 후원의 작은 연못
창경궁 통명전
2008년 통명전
통명전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양화당은 원래 대비의 처소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환궁하면서 잠시 거처하기도 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다른 창경궁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순조대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좌우엔 온돌방을,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하고 있다. 가운데 2칸에 툇마루를 두어 앉아서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하고 있고, 그 양쪽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달아 놓아 사대부집의 사랑채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익공계이며,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을 입혀 놓고 있다.
추녀마루의 잡상
조선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난간이 달린 툇마루가 있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내다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양화당 앞 마당의 작은 우물
양화당 뒷편 계단식 정원이 있는 후원
창경궁 양화당
2008년 양화당
통명전과 양화당은 행각으로 둘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넓은 마당으로 남아 있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대비전이라 할 수 있는 통명전 일대와 국왕이 사용하는 내전인 환경전 사이에는 군사들이 훈련하던 연병장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이 배치를 볼 때 넓은 공간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통명전에서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계단. 원래부터 있었던 길은 아닌것 같다.(?)
마당 한쪽에 행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있다.
통명전 서쪽편에는 화강암 석재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안쪽에는 돌로 만들어 놓은 작은 샘이 있고, 샘에서 솟아난 물이 연못으로 흐르도록 연결해 놓고 있다.
연못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돌난간과 돌기둥
연못을 지나는 돌다리. 실제 필요해서 놓은 다리라기 보다는 연못을 장식하기 위한 다리로 보인다.
통명전 옆 연못과 정원
2008년 통명전과 양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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