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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와 남쪽 안성시, 평택시와 경계가 되는 지점에 위치한 남사저수지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처인성입니다. 전체 둘레 425m의 작은 평지성으로 성벽은 토성으로 쌓았으면 별로 높지도 않고 견고해 보이지도 않은 성입니다. 이 곳이 몽골의 고려 침입시 가장 유명한 전투인 처인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고려시대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자군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써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인 몽골 기마대를 물리친 곳입니다. 처인성의 전략적 위치는 용인 이남에서 서울방향과 연결해 주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중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성벽의 규모로 보아 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만 역사적으로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한 장소로서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처인성(處仁城)은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써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43번지에 위치해 있다. 총면적 5,820평의 장방형으로 된 토성으로 본래 고려 때 군창(軍倉)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백제 때 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성곽 둘레는 425m 이며, 북벽 좌측에 출입구가 있고, 남쪽 중간 지점에 후문자리가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입구 주변의 4백 평쯤 되는 부분에는 낮은 둔석이 있다. 내부는 지형에 따라 2~3단계의 층급이 있다. 현재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토축된 주위는 3리였으나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당시 이 지방은 교통이 발달한 곳이어서 일찍부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처인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즉 고려 고종 19년(1232) 9월 몽골군의 2차 침공 때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대몽항쟁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출처: 위키백과>
김윤후는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었고, 몽골 침입 때 몽골 장군 살리타이(한자: 撒禮塔)를 처인성(處仁城 : 용인)에서 죽였는데, 그 공으로 임금이 상장군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뒤에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 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하였으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이를 격퇴시켰다.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이 되고 기타 공 있는 자는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상을 받았다. 뒤에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원종 때에는 추밀원 부사를 거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가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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