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정식명칭은 서울 문묘로서 제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기능이 있으며 성균관은 보통 향교나 서원은 뒷편 안쪽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고, 앞쪽에 교육을 담당하는 건물이 있으나, 성균관은 제사 기능을 하는 대성전이 앞쪽에 있고 강당인 명륜당이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성균관에서 교육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강당인 명륜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도서관인 존경각, 관리들이 근무하던 정록청, 제2과장이 열렸던 비천당이 있다. 명륜당 앞에는 넓고 높은 월대가 있고, 지붕에는 잡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 앞에서는 조선시대 과거도 많이 치러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륜당은 성균관의 상징적인 건물로 주변 동네 이름도 명륜당에서 이름을 따서 명륜동이다. 성균관에서 제사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으로는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중심 위인들의 위패를 모신 동무.서무, 제사를 준비하던 향관청 등이 있다. 성균관을 들어가는 입구인 성균관대학 정문에는 영조가 당쟁을 없애볼려고 세운 탕평비와 성균관의 위상을 보여주는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다.
1.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 명륜당
성균관 명륜당은 성균관 문묘의 기능인 제례와 교육 중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보통 향교나 서원은 뒷편 안쪽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고, 앞쪽에 교육을 담당하는 건물이 있으나, 성균관 명륜당은 대성전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성균관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성균관 강당인 명륜당.
2. 조선시대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서재
성균관의 실질적인 핵심 역할을 했던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는 성균관 중심 건물인 명륜당 좌우에 기숙사 형태로 건물이 서 있다. 지금도 성균관 대학 동양학부 학생들 중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기거하고 있으며, 성균관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옥 건물의 작은 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당시 유생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성균관 동재의 마당 방향 창문. 유생들의 방을 보여주기 위해 몇개의 방은 창문을 열어 놓고 있는데 조그만 방들이 줄지어 있는 폼이 영락없는 기숙사이다.
3. 성균관 명륜당 마당 은행나무
성균관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수령이 5백년쯤 되는 은행나무 한쌍. 성균관에서 잘 자꾼 나무라서 비슷한 수령의 은행나무에 비해서 줄기가 아주 두껍고 아주 울창하게 자랐다. 주위에는 여러 그루의 고목이 있기는 하지만 은행나무의 기세에 눌려서인지 크게 자라지는 못하고 있다.
4. 성균관 대성전, 동무.서무, 전사청, 수복청, 제기고
성균관 명륜당과 함께 성균관 문묘를 이루는 중심 건물인 대성전과 주위의 건물들로 지금은 공사중이라 출입을 할 수 없어 외부에서만 볼 수 있으며, 성균관 고목들로 이루어진 숲속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성균관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이고 좌우로는 중국과 우리나라 현인들의 위패를 모셨던 동무/서무가 자리잡고 있다.
성균관 대성전 좌우에 자리한 동무/서무. 공자의 제자와 중국/우리나라의 유학과 관련된 현인들의 위패 112위를 모시고 있었던 건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1949년에 중국 현인 94명의 위패는 땅에 묻고 우리나라 현인 18명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있다.
5. 성균관 신삼문, 동문, 향문
성균관 정문인 신삼문(神三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 신삼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신(神)이 드나드는 문이다.
성균관 대성전을 동쪽편에 있는 동삼문입니다. 임금이 문묘에 제사를 드릴때 출입하는 문입니다.
성균관 명륜당을 출입하는 문
6. 성균관대학 도서관으로 쓰였던 비천당
600년 전통의 성균관 대학 입구에 있는 큼지막한 한옥 건물인 비천당. 명륜당에 이어 과거를 치르던 두번째 과장(科場)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며, 일제강점기에 성균관 대학의 도서관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뒷편에는 최근에 세운 600주년 기념관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7. 대학도서관의 효시, 성균관 존경각
성균관 명륜당 뒷편에 있는 도서관이었던 존경각. 수만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던 곳었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책의 숫자가 줄어들고 일제 강점기에 서울대학 설립과 동시에 도서가 서울대학으로 강제로 옮겨졌다고 한다.
성균관 도서관인 존경각 동쪽편에 있는 작은 건물인 육일각. 이 곳은 유학의 육예 중의 하나인 대사례(大射禮) 기구들인 활과 화살 등을 보관 하는 장소라고 한다. 대사례는 선비의 기본 소양으로 생각되어 중시되었으며 글공부와 함께 체력단련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8. 조선시대 성균관 관원 사무실 정록청
성균관에 소속된 관리들이 근무하던 사무실인 정록청. 명륜당 동쪽편에 기숙사인 동재와 식당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생활을 감독하기에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정록청 뒷편에 있는 서사청(書史廳). 설명이 없어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 정록청 부속 건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9. 제사를 준비하던 향관청
성균관 문묘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제사를 지낼때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향축을 준비하던 건물인 향관청 건물 중 중앙에 있는 건물.
10. 당쟁을 없애려고 세운 탕평비
성균관 대학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있는 영조가 세운 탕평비. 아마 당시 당쟁의 중심이 성균관 이었던 모양이었는지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웠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말을 잘안들어서인지 영조시대에도 탕평책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당쟁이 해소되지는 못한것 같고, 결국 그것이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제2대 정종(定宗) 2년(1400)에 불타 없어졌다. 제3대 태종(太宗)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로 또 타버렸다. 그러나 성균관의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자금을 모아 선조(宣祖) 34∼35년(1601∼1602)에 대성전(大成殿)을 중건하고, 36∼37년(1603∼1604)에 동무(東무)·서무(西무)·신문(神門)·중문(中門)을, 39년(1606)에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건 확충하였다. 인조(仁祖) 4년(1626)에 정록청(正錄廳), 존경각(尊敬閣), 양현고(養賢庫) 등을 재건하였으며, 고종(高宗) 6년(1869)에 보수하였다. 문묘(文廟)의 동·서 양재(兩齋)를 일명 성균관(成均館)이라고도 한다. 문묘는 공자(孔子) 즉 문선왕(文宣王)의 묘당(廟堂)으로서, 대성전(大成殿)은 공자를 주로 하여 증자(曾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등 4성(四聖) 을 배향하고 다시 10철(哲)과 6현(賢)을 종향(從享)하였다. 동서 양무에는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漢)·당(唐)·송(宋)·원대(元代)의 현인(賢人)과 우리나라의 18명현 등 112명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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