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정식명칭은 서울 문묘로서 제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기능이 있으며 성균관은 보통 향교나 서원은 뒷편 안쪽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고, 앞쪽에 교육을 담당하는 건물이 있으나, 성균관은 제사 기능을 하는 대성전이 앞쪽에 있고 강당인 명륜당이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성균관에서 교육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강당인 명륜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도서관인 존경각, 관리들이 근무하던 정록청, 제2과장이 열렸던 비천당이 있다. 명륜당 앞에는 넓고 높은 월대가 있고, 지붕에는 잡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 앞에서는 조선시대 과거도 많이 치러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륜당은 성균관의 상징적인 건물로 주변 동네 이름도 명륜당에서 이름을 따서 명륜동이다. 성균관에서 제사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으로는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중심 위인들의 위패를 모신 동무.서무, 제사를 준비하던 향관청 등이 있다. 성균관을 들어가는 입구인 성균관대학 정문에는 영조가 당쟁을 없애볼려고 세운 탕평비와 성균관의 위상을 보여주는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다.
1.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 명륜당
2. 조선시대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서재
3. 성균관 명륜당 마당 은행나무
4. 성균관 대성전, 동무.서무, 전사청, 수복청, 제기고
5. 성균관 신삼문, 동문, 향문
6. 성균관대학 도서관으로 쓰였던 비천당
7. 대학도서관의 효시, 성균관 존경각
8. 조선시대 성균관 관원 사무실 정록청
9. 제사를 준비하던 향관청
10. 당쟁을 없애려고 세운 탕평비
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제2대 정종(定宗) 2년(1400)에 불타 없어졌다. 제3대 태종(太宗)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로 또 타버렸다. 그러나 성균관의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자금을 모아 선조(宣祖) 34∼35년(1601∼1602)에 대성전(大成殿)을 중건하고, 36∼37년(1603∼1604)에 동무(東무)·서무(西무)·신문(神門)·중문(中門)을, 39년(1606)에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건 확충하였다. 인조(仁祖) 4년(1626)에 정록청(正錄廳), 존경각(尊敬閣), 양현고(養賢庫) 등을 재건하였으며, 고종(高宗) 6년(1869)에 보수하였다. 문묘(文廟)의 동·서 양재(兩齋)를 일명 성균관(成均館)이라고도 한다. 문묘는 공자(孔子) 즉 문선왕(文宣王)의 묘당(廟堂)으로서, 대성전(大成殿)은 공자를 주로 하여 증자(曾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등 4성(四聖) 을 배향하고 다시 10철(哲)과 6현(賢)을 종향(從享)하였다. 동서 양무에는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漢)·당(唐)·송(宋)·원대(元代)의 현인(賢人)과 우리나라의 18명현 등 112명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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