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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는 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찰로 신라 진성여왕때부터 존재해 왔다고 전해진다. 불교 종파 중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고려 공민왕때 개혁 승려인 보우스님이 크게 중창하였고, 영조대왕이 봉원사 편액에 글씨를 하사할 정도로 번창했던 사찰이다. 하지만 서울에 있었던 까닭에 사찰의 규모가 지방의 사찰에 비해서 작고 대웅전은 한국전쟁 때 타 버렸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전각 중에서는 극락전과 만월전, 칠성각이 오래된 건물로 보이며 다른 건물들은 대부분 최건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봉원사 만월전. 만월전은 과거불인 약사여래를 모시는 불전으로 보통 약사전으로 불리지만 봉원사에서는 만월전으로 부른다.
봉원사 극락전.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으로 무량수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원사에서는 특이하게 유리창문으로 되어 있다.
극락전 편액
봉원사 미륵전. 봉원사는 개화사상의 중심지였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현대식 건물의 불전이 있다. 이 곳에서 일제강점기에 한글학회가 창립되었다고 한다.
봉원사 미륵전 앞에 있는 '나무아미타불'이라 적힌 비석과 크게 뛰어나지 않은 모습을 한 석탑이 있다.
봉원사 미륵전, 반월전, 극락전은 사찰 뒷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 도선이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보우(普愚)가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사후에는 태조의 초상이 봉안되기도 했다.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짓는 등 조선 영조 때까지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연희궁 터에 있었다. 영조 24년인 1748년에 지금의 터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라는 글씨를 쓴 현판을 내렸다. 영조의 친필 현판은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신도들 사이에서는 '새절'이라 불렀다. 정조 때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세워질 정도로 사세가 컸다. 조선 말기에는 승려 이동인이 머물러 갑신정변의 요람이 되었다. 이동인은 이 곳에서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파 청년들과 교류하였고, 일본을 내왕하면서 이들에게 개화 문물을 전해주었다. 1954년부터 시작된 오랜 불교계 분규 과정에서 사찰 운영은 태고종이, 토지 소유권은 대한불교조계종이 갖게 되어 순천 선암사와 함께 대표적인 분규 사찰로 꼽힌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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