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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객사 서쪽편 동헌이 있던 곳 안쪽에는 나주목사 내아인 금학헌이 자리잡고 있다. ㄷ자형 집으로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나주군수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지금은 숙박과 교육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건물로 원형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내부에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해 온 관청 건물이다.
나주 동헌 정문인 정수루를 들어서면 왼쪽편에는 시장이 있고, 오른쪽 편에는 나주목사 내아였던 금학헌을 볼 수 있다. 보통 권세가의 경우에 솟을 대문을 많이 사용하는데 비해 목사 내아는 솟을대문없이 일반적인 출입문을 사용한다.
나주목사 내아는 ㄷ자형 건물로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방과 부엌이 있다.
나주목사 내아 건물 가운데 부분. 3칸의 마루가 중앙에 있다.
양쪽 건물에는 방과 부엌이 있다.
나주목사내아 서쪽편 행랑채. 아마도 나주를 찾는 손님들이 묵는 방으로 보인다.
뒷마당 굴뚝
외부에서 본 나주목사 내아
조선시대 나주목에 파견된 지방관리인 목사(牧使)의 살림집으로, 건물의 이름은 ‘금학헌’이었다. 목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동헌의 정문이었던 정수루에서 서쪽으로 약 65m 떨어진 곳에 있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대문 옆에 있는 문간채를 고종 29년(1892)에 만든 것으로 보아 살림집 역시 19세기에 지은 건물로 여긴다. 앞쪽에 퇴칸을 둔 ㄷ자형 집으로 앞면 3칸 규모이며,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 남아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일제시대 이후 군수의 살림집으로 사용하면서,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다. 나주목사 내아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객사와 아문루가 함께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관아건축의 원래 모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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