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구한말에 초등학교를 설치하면서 대부분의 지방관청을 초등학교로 바꾸었는데 대표적으로 여수의 좌수영객사인 진남관이 오랫동안 학교 건물로 사용되었고, 많은 곳의 객사건물들 또한 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헐어버리고 새로운 교사건물을 지어서 실제로 옛 관청건물 중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이 곳 부평도호부 청사도 많은 건물들이 철거되어 버리고, 조그만 내아 건물만 변형된 채로 학교 운동장 구석에 남아 있다.
앞면 6칸으로 이루어진 부평도호부 청사 내아 건물. 원래 우리나라 건물에서는 짝수를 잘 쓰지 않는데 이 곳은 'ㄱ'자형 건물을 변형해서 그런지 6칸짜리 건물이 만들어졌다. 건물 앞에는 정조대왕 잠시 들렀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욕은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부평도호부 청사 내아 건물은 부평초등학교 운동장 동쪽편에 울타리 안에 있으며, 입구에는 관청건물 주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고목이 있다.
청사 건물 앞에 있는 욕은지와 어사대
역대 임금중에 공식적으로 부평을 경유해간 임금은 정조대왕 한 분이다. 정조 21년에는 김포에 있는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였다. 이때 정조는 부평에 머물며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출처:인천시청>
관청건물을 경관을 위해 심은 경관수가 고목이 되어 있다.
부평초등학교는 지금의 행정구역상 부평구에 있지 않고 계양구에 있다. 초등학교 건물 앞에 고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곳에 객사나 동헌 같은 관청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평도호부 수령을 지낸 많은 관리들의 공덕비
부평도호부 청사
고려시대 의종 4년에 안남도호부, 고종2년에 계양도호부, 조선시대 태종 13년에는 부평도호부를 설치했다.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채의 청사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부평초등학교를 지으면서 대부분 철거하여 현재는 내아만 남아 있다. 원래 "ㄱ"자형 건물이 있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자형 건물로 바꾸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도리집이 됐다. <출처:인천시청>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기관으로, 원래 중국 당나라에서 새로 정복한 이민족을 다스리기 위하여 변경지방에 설치하였던 군사적 성격의 행정기관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처음에는 중국과 같이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에는 1406년(태종 6) 지방행정체계를 정하면서, 목(牧)과 군(郡) 사이에 있는 종3품 아문으로 규정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를 크게 정비할 때, 각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415년에는 군(郡) 중에서 인구가 1,000호 이상인 것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따라서 그 수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증가하여 세종 때 38개였으나, 『경국대전』에는 44개로 늘었고, 고종 때 간행된 『대전회통』에는 75개에 이르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군으로 통합되어 폐지되었다. <출처: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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