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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여주 고달사지, 발굴작업이 끝난 고달사지 절터

younghwan 2010. 10. 1.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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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는 여주 남한강변에서 북쪽 강원도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부도를 비롯하여 여러점의 유물들이 절터에 남아 있다. 최근에 발굴작업이 완료되어 당시 절의 규모가 확인되고 있는데 상당히 규모가 컸던 사찰로 보인다.

 남한강 내륙수운의 중심지인 여주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상당히 번창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전성기는 고려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 이 사찰이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이후 남한강 주변의 대형 사찰들일 충주의 미륵사, 청룡사, 원주의 흥법사 등과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조선시대 정부의 간섭이 심해서 사찰규모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주변 사찰 중에는 세종대왕 영릉과 관계된 신륵사만이 지금도 번창하고 있다.


여주 고달사지 절터 전경. 고달사는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찰아래쪽에 있는 건물터.

고달사지 앞쪽에 있는 건물터. 불전(법당)이 있었던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변에 석조가 남아 있다.

불전터에 남아 있는 석조

고달사지 불전터 옆쪽에 있는 건물터. 이 곳은 특이하게 건물터에 석조가 같이 있으며, 이 석조는 건물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건물은 요사채로 쓰였던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건물터 내부에 있는 석조


북쪽 건물터

석불좌 주변의 건물터

경내 중앙에 위치한 석불좌

고달사지 석불좌 뒷편 건물터. 건물과 담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종대사 탑비에서 내려다 본 고달사지 절터


고달사지 절터에서 제일 뒷쪽편에 있는 건물터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가 있는 절터 뒷쪽편의 모습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훌륭한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있다.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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