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성곽(산성_읍성)

[서울 성곽] 광희문, 한양도성의 남동쪽 성문(남소문)

younghwan 2013. 6. 20. 00:42
반응형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에 있던 4개의 작은 성문 중 남동쪽 방향의 출입문인 광희문이다. 광희문은 서울남동쪽 옥수동 나루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출입구였으며, 흥인지문(동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조선시대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군영이 있었던 곳이다. 광희문 성문과 성루는 도심에 있었음에도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한국전쟁때 파괴된 것을 1973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성벽과 성루는 별로 높지 않고, 오랜 세월동안 보수가 이루어져서 그런지 다양한 형태의 돌로 성벽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때에는 임금이 역시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서울성곽(사적10호) 광희문, 서울 중구 광희동
광희문은 서울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수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 때 써 붙였다. 그후 한국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은 다시 파괴되었으며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출처:서울시청>


서울 성곽의 남소문이 광희문 성문과 문루. 이 성문과 문루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1973년 복원공사때 도로개설 등의 문제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광희문은 서울성곽 4소문 중 하나로 정문인 4대문에 비해 출입문이 작은 편이다. 광희문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숙종대에 서울성곽을 정비하면서 새로 지은 것으로 수구문이라 불리던 것을 이때 광희문이라는 편액을 받았다고 한다.


광희문 북쪽은 동대문(흥인지문)까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성벽은 허물어졌고, 남쪽으로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남쪽 또한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장충동까지 대부분의 성벽은 허물어졌다.


광희문 남쪽으로 연결된 성벽. 성벽의 높이는 3~4m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며, 방어시설로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한양도성 성곽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는 다양한 형태의 돌로 쌓은 성벽. 오랜 기간에 걸쳐서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고, 최근에 쌓은 돌도 보인다.


석축을 쌓은 화강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부분이 주로 숙종대에 쌓은 것이며, 조선초기에 쌓은 석축은 대부분 크지 않은 돌과 자연석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 많다.


광희문 남쪽 성벽




방어시설인 여장


광희문 주변 성벽 바깥쪽


광희문 주변 성곽은 많이 남아 있는 편이 아니며, 안쪽으로는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광희문 문루. 벽돌로 문루 주변에 여장을 쌓고 있다. 문루를 언제 지었는지는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숙종대에 '광희문'이라는 편액을 받았고, 영조대에 문루를 중건할 때 대상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숙종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문루는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성곽 안쪽에서 본 성문과 문루


문루 추녀마루의 잡상들


광희문 성문.


이 곳 주변에는 여장이 거의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모두 최근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흥인지문에서 단절된 한양도성의 성벽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원래 광희문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약간 남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2010년 광희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