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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_현대 건축

정동 구러시아공사관, 하얀 탑만 남은 구한말 아관파천 현장

younghwan 2010. 3. 2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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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 덕수궁 뒷편 언덕위에 남아 있는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이다. 현재는 출입문이 하얀 탑만 남아 있다.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고종이 잠시 피신을 했던 곳으로 역사적인 사건인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덕수궁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의 힘겨운 역사를 말해주는 건물이다. 한국전쟁시 대부분의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었다고 하며, 냉전체제하에서는 비어 있었던 건물터로서 90년대 초 한.러 수교시 러시아에서 돌려달라는 이야기도 있었던 곳이다. 현재 러시아대사관은 배재고등학교가 이전한 자리 일부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정동빌딩 옆 언덕 위 제일 높은 곳이 위치한 옛 러시아공사관. 현재는 하얀 탑만 남아 있고, 지하실도 남아 있다고 한다.


르네상스풍으로 만든 건물이라고 하는데, 어딘지 러시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물이다.


구러시아공사관은 정동에 위치한 각국 대사관 중에서 제일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덕수궁과 주위의 각국 대사관, 교회, 학교 등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이다.


현재 러시아 대사관이 위치한 옛 배재학당 터에 있는 배재공원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다. 이 기간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쳐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 현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출처:문화재청>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고종과 세자가 경운궁을 떠나, 어가를 아라사 공사관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친일 세력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당시 일본과 대립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심야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였다. 고종은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하였다. 이어 1895년 8월 22일에 왕후 민씨를 폐한다고 내린 조칙 등을 위조된 것으로 명하여 취소케 하였다. 이날 김홍집과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과 가까워지며,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다. 또한 러시아는 경원과 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이에 1897년 2월 18일,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 고종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의 행동이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상황의 논리”와 그 주체적 의도를 높이 봐야 한다는 평가가 대립한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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