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송국리 선사 주거유적지는 부여와 논산의 경계가 되는 부여군 초촌리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선사유적지이다. 구석기 주거지인 공주 석장리나 연천 전곡리와는 달리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8~9세기 무렵의 주거유적지로서 동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된 곳이다. 이 곳은 전곡리나 석장리, 또는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와는 달리 강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벼농사와 관련된 볍씨를 포함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벼농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물로 이 곳 송국리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 유적지는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기때문에 볼 수는 없지만 선사 유적지가 형성된 지역적 특징과 여러 모형들로 선사시대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선사 주거유적지가 있는 부여 송국리를 들어 가는 입구. 목재로 선사시대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송국리 선사 주거유적지를 그린 그림. 평야지대에 있는 낮은 구릉지에 주거지가 자리잡고 있다. 뒷편인 북쪽은 높지는 않지만 산간지대가 발달되어 있고, 앞쪽으로는 넓은 논산평야가 펼쳐져 있다.
도로변에 있는 송국리 선사유직지 관련 전시관과 집터 모형들이 있고, 실제 주거지에는 그냥 흙으로 덮혀 있다.
전시관 뒷편에 위치한 실제 송국리 유적지. 낮은 구릉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적이나, 동물로부터 방어하기 쉬운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송국리 선사 주거유적지 주변의 넓은 평야. 논농사가 발달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곳에는 큰 강은 흐리지 않지만, 북쪽편에 있는 높지는 않지만 계룡산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에서 개천이 흘러와서 금강을 향해서 흘러가는 지역으로 수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송국리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집터 형태인 원형집터와 장방형 집터에 따른 당시의 주택을 재현해 놓고 있다.
송국리 유적지에 전시된 송국리집터(원형집자리)
이제까지 조사된 43기의 집자리유적 중 원형집자리는 14기인데 중심지역은 54지구이다. 크기는 평면의 지름이 3.5~5.3m, 깊이 0.3~1.5m로, 크기가 다양한데, 대개 지름이 4.5m내외이다. 원래 깊이는 1m가 넘었으나 많이 깎여 나간 듯하다. 바닥 중앙에 길이 1m정도의 구덩이를 길게 파고 그 양쪽 끝 부분에 기둥구멍을 대칭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인데, 원형이나 방형 집자리에 이런 구조를 가진 것을 송국리형 집자리하고 부른다. 이 구덩이 바깥 양쪽에, 혹은 구덩이 주위에 4개 기둥을 배치한 형식이 있다. 출입구 시설은 보이지 않아 사다리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닥에는 흙을 깔거나 다진 흔적이 있으나 화덕이 보이지 않는다. 층위로 보아 환호나 나무울타리, 방형 집자리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출처:부여군청>
송국리집터(장방형집자리).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모습이 후대의 주거시설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원형집터보다 연대가 빠르다고 한다. 동시대에 같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기능적인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원형 집자리보다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집자리는 짧은 변이 3~5m, 긴 변이 4~7m, 깊이 0.3m 정도이며 넓이는 24~28m²정도이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을 5m²로 계산하면 하집에 5~6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 집자리에서 보이는 타원형 구덩이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화덕시설이 명확하지 않고, 출입구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54-2호 집자리에서는 벽면에 판자를 세워 마무리하였다. 54지구와 57지구 조사결과 나무 울타리와 집자리를 짓기 위하여 경사면을 깎아 대지를 마련한 공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형 집자리보다 깊이가 얕아 반수혈 혹은 지상건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층위로 보면 원형 집자리보다 이르지만, 기능의 차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부여군청>
이 곳에서 발굴된 돌널무덤과 독무덤
이 곳 송국리 주거유적지에서는 주거지를 둘러싼 목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거시설을 재현해 놓고 있는데 목책 앞에는 경사진 벽에 작은 나뭇가지를 꽂아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이나 동물들을 저지하는 시설인 녹채와 당시의 토속신앙의 상징물인 솟대를 만들어 놓고 있다.
현재 조사된 길이는 54~57지구에 걸쳐 430m에 이른다. 울타리의 진행방향이나 지형, 조사된 집자리의 분포범위를 고려하면 돌널무덤이 자리한 남쪽 경사면부터 시작하여 동쪽 건너편 47지구 언덕으로 연결되거나, 혹은 그 동쪽 42지구를 포괄하는 지역으로 연결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보면 나무 울타리 안에 포함되는 면적은 최소 30ha에서 60ha에 이른다. 기둥 간격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54지구에서는 폭이 1.8m로 일정하며, 그 남쪽 지역은 2.2~2.4m, 57지구에서는 1.3m인 것도 있어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또 기둥 구멍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대형.중형.소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원형 기둥을 세우고 가로로 나뭇가지를 엮어 점토 벽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나무 울타리 시설을 원형 집자리가 파괴하고 지나가고 있어 안쪽에 자리한 방형 집자리와 연관이 있으며, 원형 집자리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보인다. <출처:부여군청>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벼농사를 대표하는 유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이 곳 송국리에서 출토된 볍씨와 반달형 돌칼 (반월형석도)
송국리형 민무늬토기와 송국리형 집자리로 대표되는 문화유형을 송국리형 문화라고 부른다. 이외에 삼각형 반달칼과 홈자귀, 작은 석검이 표식유물인데, 이들의 주인공이 가졌던 생계방식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였다. 절대연대로 보면 과거에는 기원전 5~6세기로 추정하였으나, 현재로서는 기원 8~7세기까지로 올려보고 있다. 이삭따는 반달칼이나, 땅을 파는 도구인 홈자귀, 갈판 등이 발굴된 것은 송국리 주민들이 농사를 지었다는 방증자료이다. 특히 54-1호 집자리에서 나온 불탄 쌀은 토기 바닥에 찍혀 있는 볍씨자국과 더불어 벼농사가 이루어진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줄 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에 쌀농사가 전해진 경로를 추정해 보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 쌀은 화북지방에서 동북지방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 들어간 전파과정을 말해 준다. 송국리 일대에서 논 유적을 찾는데 실패했으나, 다른 벼농사 유적의 입지와 매우 비슷하고 구릉의 양쪽으로 흐르는 작은 냇가와 저지대, 집자리가 자리한 낮은 구릉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논농사의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부여군청>
송국리에 출토된 석기. 농경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송국리형 석기의 특징.
이사따는 도구로 반달칼이 나왔고, 화살촉이나 석검.석창.환상석부같은 무구, 그리고 생산 및 생활도구로 돌도끼.돌끌.칼.대팻날.흠자귀.숫돌.방추차.갈돌과 갈판.망칫돌 등이 있다. 수화도구들이 많이 나오는 한편, 그물추는 한 점도 없어, 송국리인들이 고기잡이 보다는 농경에 기반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여러 종류의 숫돌이 많이 나와 석기제작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소형의 숫돌이 많은 것은 휴대용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칼판과 갈돌은 신석기시대에 이어 널리 사용된 조리용구였고, 방추차가 많은 점으로 보아 베를 짠 직조기술도 상당히 발달했을 것이다. 불탄나무판자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을 말해준다. 특히 거풋집이 집자리에서 나온 것은 최초의 일로, 초보적이나마 청동기 주조도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출처:부여군청>
송국리형 토기 (복제품)
좁은 바닥에 배부분이 팽창되다가 아가리부분에서 좁아지고 다시 입술부분에서 밖으로 벌어지는 특징적인 토기를 송국리형 토기라고 부른다. 이런 형태를 가진 완전한 토기가 송국리에서 처음 나와서 붙인 이름인데, 요즈음에는 충청남도를 비롯하여 호남지방, 경상도지방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서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20여개소에서 비슷한 토기가 발견되었다. 점토에 장석이나 운모, 고운 모래알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홍토의 바탕흙처럼 고운 것도 있다. 최대 지름이 배 부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불안하기도 하나, 전체 균형이 잘 어울리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 집자리와 더불어 송국리 문화를 대표하는 표식중의 하나이다. <출처:부여군청>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忠淸南道 扶餘郡 草村面 松菊里)는 초촌면 소재지에서 동북으로 1.5㎞에 자리한다. 해방 30m안팎의 낮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동, 남, 북, 세면에 기름진 들이 펼쳐진 전망이 좋은 곳이다. 1974년에 유적이 알려지면서 석관(石棺)무덤과 그 안의 부장품으로 비파형동검, 간돌칼 같은 남쪽에서는 처음 알려진 유물들이 드러났고, 반달칼, 돌도끼, 놋창끝 등이 나와 이듬해부터 발굴에 들어갔다. 유적의 발굴은 1975년 부터 1987년까지 7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집터 33기, 석관(石棺)무덤 1기, 옹관(饔棺)무덤 4기 등이 드러났으며, 그밖에 청동기시대의 많은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석비례층을 20∼40㎝ 깊이로 파고 지은 앝은 움집으로, 집자리 테두리는 둥근꼴, 둥근넙적꼴, 긴네모꼴의 세가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둥근 집자리에서는 기둥구멍이 가운데 있어 광주 송암동 유적과 해미 휴암리 유적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닮은 꼴이고, 긴네모꼴 집자리에서는 가는 나무가지를 이용한 벽체를 세워 기둥을 받치도록 한 짜임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로는 집자리 벽선과 어깨부분에 비스듬한 기둥을 세워 집을 지탱한 곳도 있다. 지붕에 얹었던 기둥과 짚이 불에 탄채 고스란히 드러나 우진각 지붕을 얹었던 것으로 미루어진다. 집크기는 대체로 10∼20㎡안팎의 작은 규모이며, 가장 큰 것은 38㎡쯤이다. 집에 딸린 작은 터는 창고시설로 보인다. 질그릇에서 송국리 토기로 부를 수 있는 민토기의 독특한 모습이 있고, 붉은 간토기도 나오고 있다. 석기로는 세모돌칼, 돌검, 돌화살촉, 맷돌, 도끼, 대패날이 있으며, 나무자루가 달린채 나온 돌검과 돌날이 있고, 부채날 청동도끼의 거푸집도 나왔다. 집자리와 관련되는 석관(石棺)무덤에서 비파형동검과 청동끌이 나와 송국리 사람들이 청동기를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 송국리 사람들이 석관(石棺)무덤과 옹관(饔棺)무덤을 쓴 것은 뚜렷하며, 부여지역에서 고인돌무덤이 여럿 나왔고, 송국리 유물이 고인돌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과 비슷한 성격을 띈 점으로 보면 고인돌 무덤을 만들기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국리유적의 연대는 유물 갖춤새를 다른 유적들에서 나온 것과 견주어 B.C 8∼9세기의 유적으로 볼 수 있다. 송국리 54지구의 집자리에서 나온 숯을 연대측정(C14방법)한 결과는 2,665±60B.P,2,565±90B.P로 밝혀졌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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