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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사시대 유적지인 공주 석장리 유적지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오랜기간 동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60년대 미국인 대학원생이 이 곳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우리나라 고고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유적지라고 한다.
구석기 전기부터 신석기, 청동기 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강가에 좋재했던 많은 선사주거지처럼 이 곳도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유적지이다.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석장리 선사유적지. 북쪽으로 낮은 야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금강이 흐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서 오랜 기간 동안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거지 서쪽편을 1지구라고 하며 81개 구덩에서 6개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발굴을 끝내고 움집을 세워 놓고 있다.
주거지 동쪽편이 2지구이며 13개 문화층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동쪽편에서 본 석장리 선사유적지. 발굴이 끝나고 흙으로 덮어 놓았다.
선사유적지 위쪽으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사주거지 형태를 바탕으로 당시 움집을 재현해 놓고 있다.
석장리 선사유적지 구분
석장리 박물관 전경
표지석
석장리 유적을 처음 찾은 것은 1964년 봄 미국인 대학원 학생인 앨버트 모어(Albert Mohr)와 그의 아내 엘 샘플(L.L Sample)이었다. 그들은 부산의 영도 동삼동 신석기시대 조개더미 유적을 발굴하고 난 다음 이 곳 석장리 금강가를 답사하던 중 무너진 층에서 맨석기를 찾았다. 그 후 선사 유적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연세대학교 사학과 손보기교수와 더불어 1964년 석장리 유적을 답사하여 샇임층이 무너진 곳에서 석기를 다시 찾고, 발굴허가를 거쳐 그 해 11월부터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발굴을 시작하여 1964~1974년 10차까지는 연세대학교박물관 발굴단에 의해 11.12차는 한국 선사문화 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우리의 역사가 단군시대(청동기시대)보다 앞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이 땅에서 사람이 살아왔다는 귀중한 사실을 밝히게 한 유적이다. 발굴결과 석장리 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 전기.중기.후기 그리고 중석기시대의 문화층이 가늠되었고,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물도 찾아졌다. 이렇듯 석장리 유적은 선사시대 전세기에 걸쳐 사람이 살았던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밝혀졌고,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 고고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유적이기도 하다. 발굴결과 1지구 81구덩이에서는 28개의 쌓임층에서 6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2지구 1구덩은 27개 쌓임층에서 13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후기 구석기시대의 집터 화덕자리.사람머리카락 등도 찾아졌다. <출처:석장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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