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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은 세종대왕의 능으로 원래는 서울 내곡동 태종의 능인 헌릉 서쪽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을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현재의 위치인 여주로 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주로 이장하면서 기존의 석물들은 무거워서 옮기기 힘들다고 하여 땅속에 묻었다고 하는데, 70년대에 그 석물과 옛 영릉 석실들이 발굴되어 현재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옛 영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으로 현재의 영릉과는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 전시된 석물들은 영릉에 있었던 모든 석물들이 발굴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남아 있다고 한다. 발굴된 석물은 무인석 2기, 문인석2기, 석양.석마 2기씩,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 고석과 신도비가 있다.
청량리 옛 홍릉 능역에 속했던 뒷산에 위치한 세종대왕기념관 마당에는 서울 내곡동에서 발굴된 세종대왕의 능인 옛 영릉이 있었던 자리에서 발굴된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관석인상 (문인석). 후대에 만들어진 왕릉의 석상에 비해서 조각수법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든 문관석인상이다. 왕릉 석인상답게 큼직하면서도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등과 허리의 굴곡이 약간 살아 있으나 전체적으로 몸 전체가 기둥모양으로 되어 있다. 같은 시기의 석인상들보다 머리부분이 매우 큰 편이며 특히 부피감이 풍부하게 묘사된 얼굴과 큰 귀, 세밀한 수염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젊고 동양적으로 표현된 이 문관석인상은 다른 하나의 문관석인상과 같이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데 머리에 쓴 복두는 양 날개 같은 각(脚)이 위로 올라간 형식을 보이고 있다. 입고 있는 옷은 매우 규칙적이고 분명한 7겹의 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소매 끝자락은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져 마무리되었다. 왼손에는 조선시대에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갈 때 손에 쥐던 홀(笏)을 쥐고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다. 허리에는 중간중간 나뉘어진 각대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문관석인상은 소매 끝자락의 표현 등 15세기 후반 이후 석인상에 주로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무관석인상 (무인석)
세종과 그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가 묻혔던 옛 영릉의 무관석인상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2기의 무관석인상 가운데 키가 약간 작은 무관석인상이다. 이 무관석인상은 남아 있는 4기의 석인상 가운데 가장 상태가 양호하다. 문관석인상에 비해 무관석인상은 전체적으로 몸의 굴곡이 더 살아 있고 얼굴의 표현도 생동감 있다. 크게 부릅뜬 눈과 큼직한 주먹코, 도톰한 양 볼과 꾹 다문 입 모양 등은 험상궂으면서도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 입고 있는 갑옷은 끈 장식 등 각종 장식과 솟을고리무늬·덩굴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허리 아래를 두른 갑옷에 표현된 여러 겹의 주름과 아래로 늘어진 도포자락에 나타나는 주름 표현 등은 매우 사실적이다. 한편 무관석인상답게 칼집에서 칼을 빼 손으로 짚고 있는 모습을 나타냈는데, 손 모양은 오른손이 겉에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문화재청>
석양상
구 영릉에 있던 석양상은 현재 2기가 남아 있는데, 모두 숫양을 조각한 것으로서 크기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2기 모두 뿔이 세 겹으로 안쪽을 향하여 꼬여 있고, 다리 사이는 돌을 파지 않고 그대로 편편하게 다듬어 풀 모양의 무늬를 새겼다. 눈 주위의 주름과 신체 기관까지 비교적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오랜 풍화로 인해 석재 부식이 진행되어 조각이 약간 마멸되어 있는 상태이다. <출처:문화재청>
석마상
구 영릉에 있던 석마상은 석인상들의 뒤에 세워 놓은 석물로서 현재 2기가 남아 있다. 2기 모두 목 부분이 부러진 채 발굴되었다. 석마상 역시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신체 각 부분과 근육에는 양감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고 갈기와 귀는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받침돌과 네 다리 안의 모습은 석양상과 같다. <출처:문화재청>
장명등
장명등은 문무관석인상과 석마상을 좌우로 하여 봉분 앞 한가운데 북쪽 가까이 설치한 석등이다. 현재 지붕돌 이상은 없어진 상태이며, 불을 켜는 부분인 화사석과 간주석은 모두 8면으로 조각하였는데, 화사석의 4면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창이 뚫려 있다. 가운데 받침돌과 아래 받침돌에는 각각 위로 향한 연꽃무늬와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북모양의 석물인 고석. 4면에 도깨비를 새겨 놓고 있다.
고석은 북 모양의 석물로서 왕릉 가운데는 고석을 5기 사용하는 것이 많으나 구 영릉에서는 4모서리에 4기의 고석을 사용하였다. 현재는 1기만이 남아 있다. 중간이 불룩하게 만들어진 고석은 4면에 도깨비 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그 위아래로는 구슬띠모양의 무늬가 둘러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난간석으로 보이는 석물들
세종대왕 신도비.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비석으로 머리돌과 몸돌이 하나로 되어 있다. 중국 당나라시대부터 사용한 비석의 형태로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거북모양의 받침돌을 잃어버려서 새로 만들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우는 비로, 이 비의 주인공은 조선 제 4대 임금 세종대왕이다. 비의 받침은 거북받침돌을 잃어버려 자연돌로 대신하였고 그 위에 비몸을 올렸으며, 용을 조각한 머릿돌은 비몸과 한돌이다. 비문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나, 비문의 내용을 실은 책이 전하고 있어서, 세종대왕의 업적과 왕후, 빈(嬪), 그 소생에 관해 간단히 적고 있다 한다. 앞면의 비이름은 정인지의 글씨이고, 뒷면에 새긴 글은 김요가 지은 글에 안평대군 이용이 글씨를 쓴 것이다. 제작은 정분과 민신의 지도아래 150여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2년만에 완성하였다. 문종 2년(1452)에 세운 비로, 강남구 내곡동의 구 영릉(舊英陵)터에 묻혀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지금의 자리인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왔다. <출처:문화재청>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구 영릉은 세종과 그의 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릉으로 태종의 릉인 헌릉(獻陵)의 서쪽 산등성이, 즉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세종 32년(1450) 세종이 서실에 합장되고 문종 2년(1452) 세종대왕신도비가 건립되면서 그 공역(工役)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예종 원년(1469)에 구 영릉의 위치가 풍수지리상 길지가 되지 못한다는 논의가 있어 영릉은 현재의 영릉으로 천장(遷葬)하게 되었다. 구 영릉은 『국조오례의』의 치장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이자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능이었다. 구 영릉은 동분이실(同墳異室)의 석실을 채택하였고, 이실의 예에 따라 문관석인상과 무관석인상을 각각 2기, 석양·석마·석호를 각각 4기씩 제작하였다. 석실 내부에는 고구려 계통의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 일월성신도를 그렸으며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돈 병풍석으로 둘렀고, 그 바깥쪽으로 다시 외박석(外薄石)과 난간주석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구 영릉에는 세조의 릉인 광릉부터는 보이지 않는 신도비도 세워졌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장대한 왕릉제도는 구 영릉 이후 최초로 조성된 문종의 릉인 현릉과 세조의 릉인 광릉부터는 적용되지 않게 된다. 또한 같은 세종의 릉이라도 현재의 영릉은 예종 때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구 영릉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왕릉인 구 영릉을 구성하는 ‘구영릉석물’들은 구 영릉 조성과 시기를 같이 하여 세워진 것으로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 발굴당시의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다. 각각 4기씩 조성되었을 석양상과 석마상은 현재 각기 2기씩 남아 있고, 2기였던 망주석은 현재 1기 중 일부만이 남아 있다. 장명등과 석인상은 다 갖추어져 있으나 장명등의 경우 개석이 망실되어 있다. 세종대왕신도비는 이수와 비신만 남고 귀부가 망실된 채 발굴되었다. 혼유석은 동측 부분이 절단된 상태이고 원래 4기였을 고석(鼓石)은 1기만 남아 있다. 병풍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난간주석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릉에서는 크기가 일정한 양상을 보이는데, 세종대왕기념관내에 있는 7기의 난간주석은 2기가 나머지 5기와 크기와 제작기법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바, 어느 것이 구 영릉의 난간주석인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석호상은 1974년 발굴 이후 2기가 현재의 영릉으로 이전되어 갔고, 나머지 2기는 발굴 전 도굴되었다가 회수되어 단국대박물관에 옮겨졌다 하나 역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죽석(竹石)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있으나 발굴 당시 구 영릉 봉분 터 주위에서 죽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바 죽석에 대해서도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번에 지정되는 석물은 추후 확인이 필요한 것과 서울 지역 외 석물들을 제외한 총 13기이다. 이와 같이 조성 당시의 석물의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지만, 구 영릉석물들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방식과 제작수법 등을 알 수 있게 하고, 당시의 양전척, 주척 등을 환산할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발달 정도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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