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쪽편에 위치한 조선중기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모신 태릉 입구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이다. 이 전시관은 최근에 세워진 곳으로 조선왕실에서 국왕이 승하하는 순간부터, 국장행사의 진행, 왕릉의 조성과 관리까지 조선왕릉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 전시된 내용은 주로 왕릉에 대한 설명과 그 설명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유물(복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국장은 왕이 승하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주요 절차를 보면 도감의 설치 -> 빈전에 안치 -> 왕의 즉위 -> 시호를 올림 -> 명당선정 -> 왕릉조성 -> 왕릉으로 모심 -> 삼년상 후 종묘에 모시는 순서로 진행된다. 기간은은 왕릉으로 모시기까지 5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며, 종묘에 모시기까지는 전체적으로 3년의 기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국장 종료후에는 의계를 편찬하여 진행절차를 기록을 남긴다.
서울 태릉 입구에 단층건물로 지어진 조선왕릉전시관. 최근에 지어져서 그런지 조경작업이 아직도 진행중이다.
장렬왕후 빈전도감의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인조의 비 장렬왕후가 돌아가신 후 빈전에서 행하였던 의례절차를 정리한 의궤로 도감의 설치에서 빈전에 안치까지의 의례를 정리한 내용으로 보인다.
삼도감의 설치
왕이 승하하면 조정에서는 국장을 준비하는 임시관청인 도감을 설치하고 업무를 담당할 관리를 뽑았다. 국장을 담당하는 도감은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 있으며 삼도감의 총괄은 충효사가 맡았다. 국장이 종료되면 의궤청을 설립하여 국장의 진행 절차와 국장에 소요된 품목, 참여한 인원을 상세히 적은 의궤를 제작하여 왕실 행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빈전에 안치
왕의 시신은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빈전에 모신다. 빈전으로 사용하는 전각은 궁궐 중에서도 왕이 집무를 보는 편전이나 침전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경복궁에서는 태원전, 창덕궁에서는 선정전, 창경궁에서는 환경전을 빈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왕의 즉위
새로운 왕의 즉위식은 왕이 승하하고 5일 이후에 이루어진다. 즉위식은 대개 선왕의 장례기간 중에 진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간소하게 치러지며 예법에 따라 악기를 설치하지만 음악은 연주하지 않는다. 왕세자는 선왕의 시신이 안치된 빈전 앞에서 상복을 갖추어 입고 제사를 지내다가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서 즉위식을 거행한다. 즉위식이 이루어질 때 왕세자는 상복을 벗고 왕을 상징하는 면복으로 갈아 입는다. 그리고 선왕의 유언장인 유교와 조선국왕의 상징인 어보를 받아 어좌에 오른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태릉.강릉에 모셔진 문정왕후, 명종과 인순왕후의 어보(복제품)이다. 종묘에 안치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시호를 올림
왕이 승하하면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이름인 시호를 결정한다. 시호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왕의 일생을 정리한 글인 행장을 작성한다. 이후 시호를 관장하는 기구인 봉상시에서 시호에 사용할 글자를 선정하고 최종적으로 왕의 검토를 받아 선왕의 시호를 결정한다. 시호가 결정되면 책보를 제작한다. 책보는 시호를 새긴 왕의 도장인 시보와 시호의 의미를 적은 시책을 제작한다. 책보는 시호를 새긴 왕의 도장인 시보와 시호의 의미를 적은 시책을 의미한다. 책보의 제작은 국장도감에서 주관하였으며 책보에 들어가는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가가 작성하였다. 책보를 제작한 뒤에는 책보를 받들어 종묘에 고한 후에 궁궐로 가져와 빈전에 모셨다. 책보는 발인할 때 함께 왕릉으로 모셨다가 다시 환궁하면 혼전에 안치되었고, 2년 후에는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의 신실에 모신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명릉도 (고궁박물관 소장). 조선 19대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을 그린 왕릉도이다. 국장을 진행하는 기관 중 하나인 산릉도감에서 왕릉의 조성을 마친 후에 만드는 기록이라고 한다.
명당선정
왕릉을 조성할 지역 선정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왕릉의 위치는 지형적으로 명당이면서 또한 궁과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이는 후왕들이 선왕의 능을 자주 참배하고 하는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새로 즉위한 왕과 풍수에 밝은 대신들 그리고 관상감의 지관들은 승하한 왕의 유언,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주변 능과의 거리 등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조선왕릉을 조성할 최고의 명당을 선정하였다. 조선왕릉의 지형은 배산임수를 기본으로 하였다. 산허리에는 봉분을 두고 두 산맥이 좌우를 감싸며 봉분의 맞은편에 마주하는 산이 있어야 훌륭한 자리라고 여겼다. 왕릉의 조성을 마친 후에는 지형과 왕릉에 설치된 시설을 그린 왕릉도를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순조인릉 산릉도감의궤 (서울대 규장각 소장). 1845년 11월부터 1835년 4월까지 순조 인릉의 조성절차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며 상.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왕릉은 국왕 사후 5개월 동안 조성된다고 한다.
왕릉조성
조선왕릉은 산릉도감에서 업무를 분담하여 조성하였다. 봉분은 삼물소에서 조성하였고, 정자각과 비가, 재실 등 건물은 조성소에서 세웠으며, 석물 조영은 대부석소에서 맡았다. 관이 놓일 위치를 결정한 후에는 능상각을 세워서 관을 모실 자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왕릉 조성에는 전국가지에서 모집한 사람들이 투입되었으며, 2천명에서 5천명까지 참여하였다. 조선왕릉이 조성된 구역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왕릉 가까이 있는 무덤은 이장하게 하였으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여 보호하였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빈전에 모셔졌던 왕의 관을 능지로 모시는 발인행렬을 묘사한 미니어쳐. 의게에 근거해서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대단한 행렬임을 알 수 있다.
왕릉으로 모심
빈전에 모신 왕의 관을 능지로 모시는 절차를 발인이라고 한다. 발인 행렬에는 군사들의 호위 아래 시책, 십, 부장품, 신주를 실은 각종 가마들의 행렬이 이어지며, 좌우로 흉의장과 애도하는 글을 적은 만장이 지나간다. 그 뒤로 왕의 상여인 대여가 이어지고, 행렬의 후반부에는 곡을 하는 궁녀와 동반.서반의 관리들이 위치한다. 왕의 발인은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는 커다란 행사이도 했다. 빈전에서 왕릉까지 수많은 인원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국장도감에서는 발인 전에 행렬의 순서를 그림으로 제작했으며 이를 통해 국장 행렬을 미리 확인하고 숙지하였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왕릉 부장품 목록
왕릉 부장품 중 악기와 무기
식기와 제기. 신라 고분과는 달리 조선왕릉에는 작은 모형을 부장품으로 묻고 있다.
왕릉의 부장품
조선왕릉에는 사후에도 살아계실 때와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왕이 실제로 착용했던 의복과 생활용품을 축소하여 만든 명기 등의 부장품을 함께 묻는다. 부장품은 조선왕릉의 내부가 석실인 경우에는 석실내부와 편방에, 회격일 경우에는 회격 앞 퇴광에 넣는다. 조선왕릉 부장품은 문헌을 통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조선초기 <국조오례의>와 조선후기 <국조상례보편>을 통해 시대에 딸른 부장품 항목과 수량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복완은 가장 격식을 갖춘 예복인 면류관과 면복 등으로 구성된다. 명기는 크게 왕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식기.제기.악기.무기로 구성된다. 조선초기 명기의 항목이었던 목인은 순장 풍습의 흔적이었는데, 영조의 명으로 18세기 중반부터 부장품 목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출처: 조선왕릉전시관>
조선왕릉 내부는 초기에는 석실로 조성했으나, 세조 이후 공사의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서 회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왕릉 내부
조선시대에는 왕릉 봉분 아래 석실이나 회격을 만들어 재궁을 모셨다. 조선왕릉의 내부구조는 문헌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조선초기 <국조오례의>에는 석실 구조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 영조 대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에는 회격의 제작 방법을 공정 순서에 따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조선초기까지 석실 구조였던 조선왕릉은 세조가 자신의 무덤은 석실로 조성하지 말고 회격으로 만들라고 유언으로 남긴 이후로 회격으로 변한다. 이는 왕릉을 조성할 때 과도한 인원이 투입되는 것을 막아 백성의 노고를 덜려는 애민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회격은 시간이 지나 굳어지면 돌만큼 단단한 강도를 지니고 제작 공정이 간단하여 이전보다 공정에 적은 인원을 투입하여 짧은 시간에 조성할 수 있었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정조 국장도감의궤 (서울대 규장각),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국장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에는 반차도를 비롯하여 국장에 쓰인 가마류, 부장품 등 각종 기물을 그린 책색 도설이 상세히 실려있다.
왕의 관을 왕릉에 안치한 후에는 신주를 받들어 궁으로 돌아와 혼전에 모신다. 혼전에 모신 왕의 신주는 삼년상을 마친 후에 종묘로 옮기는데, 이러한 의례를 부묘라고 한다. 왕의 경우는 삼년상이 끝나는 대로 부묘하였다. 왕비는 왕의 생전에 상을 당할 경우 삼년상이 끝난 후에도 계속 혼전에서 신주를 모시다가 왕의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부묘하였다. 부묘의 준비와 진행은 부묘도감이 담당하였다. 부묘도감의 여러 하부기구는 업무를 분담하여 왕의 신주를 종묘로 안전하게 옮기는 일과 가마.제기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부묘 이후 왕에게 드리는 제사는 길례로 전환되었다.
조선왕릉에는 비석을 세워 능에 모신 분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거대한 신도비를 세워 왕과 왕비의 생애를 자세히 다루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신도비보다 작은 표석을 제작하여 왕과 왕비의 생몰년과 책몽일을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신도비가 있는 조선 왕릉으로는 태조 건원릉, 신의왕후 제릉, 태종 헌릉, 구 세종 영릉이 있다. 세조 이후로 능역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 제도가 정착하였다가, 조선 후기 영조 대에 들어서 조선왕릉 전역에 표석을 세우게 하였다.
화성의 사도세자 융륭을 모시는 사찰로 정조대왕이 중건한 용주사
조선왕릉을 모시는 사찰
조선왕릉 근처에는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례를 지내는 사찰이 있다. 이러한 사찰은 원찰, 능사 또는 조포사라고도 하였다. 조포사는 조선시대 사찰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산릉제례에 사용하는 두부를 만들어 제공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건국초 태조 비 신덕왕후 정릉에 흥천사를, 태조 건원릉에 개경사를 세웠지만, 그 후 태종의 명으로 태종 헌릉부터는 사찰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조 비 정희왕후가 세조 광릉에 봉선사를 세우고, 이후 주로 왕후와 대비 등 내명부의 지원을 받으며 세워진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선.정릉의 봉은사와 융릉의 용주사 등이 있다.
헌릉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조선 3대 태종의 업적과 헌릉 관리에 관련된 제반 사항을 기록하였다. 헌릉지는 산릉제례의 절차나 봉심할 때 유의 사항, 헌릉 수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능참봉의 업무내용과 지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로 있다.
강명달 광릉 참봉 교지 (규장각), 보통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시대 최고 말단직인 능참봉 임명장이다.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는 능참봉의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능참봉을 지낸 강명달은 1787년에 인경왕후 익릉의 령으로 임명되었고, 1788년에 정3품에 해당하는 절충장군에 올랐다고 한다.
헌릉관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태종 헌릉을 관리하면서 사용하는 도장이다. 헌릉관관방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왕릉의 관리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 이후에도 매년 제레를 올리고 예를 다하여 정성껏 관리하였다. 효를 중시하였던 조선의 왕은 자주 능에 행차하여 참배를 드리고, 능 관리에 만전을 기하였다. 왕릉 주변에는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레를 지내는 사찰을 두었고, 왕릉이 관리는 연륜있는 자에게 맡겼다. 능 관리자는 능지를 제작하여 관리상의 주요 사항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을 보면 왕릉 관리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왕릉의 관리에는 많은 비용도 소요되었기 때문에 각 왕릉마다 약 80결(약 80만 m²)의 땅이 주어졌다. 조선왕릉은 왕의 직접적인 관심과 철저한 능 관리로 현재까지도 원형을 잘 보존 할 수 이썼고, 왕릉의 산릉제례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6백년 넘게 이어지면서 조선왕조 무형 문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조선 왕릉의 관리자
조선왕릉의 관리자는 주로 종9품 참봉 2명으로 구성되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능 관리자 2명 중 1명은 종5품 령, 종7품 직장, 종8품 별검 등으로 때에 따라 교체하여 임명할 수도 있었다. 능관은 연륜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는데, 왕릉의 관리와 제례를 지내는 책임이 막중하였기 때문이다. 능관은 왕릉 내 재실에 거주하며 왕과 왕비의 제례와 능을 살피고 능역 내의 수목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수복과 수호군을 잘 보살피는 것도 능관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명릉을 찾은 감회를 적은 현판, 1756년 영조가 그의 아버지의 능인 숙종 명릉을 참배한 후 그 감회를 지어 서명응에게 쓰도록 한 현판이다.
능행
조선시대 왕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자주 왕릉에 행차하였다. 능행은 선왕에 대한 효를 표현하는 동시에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왕의 위엄과 상징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중요한 의례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의 능행이 증가했는데 영조는 재위 52년간 70여 차례, 정조는 재위 24년간 60여 차례에 이르렀다. 왕은 재실에 묵으면서 제례와 왕릉의 봉신, 개수 등의 역사에 친히 임하고 그 감회를 적어 재실에 걸어두기도 하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능행 행렬은 백성들이 왕을 직접 뵐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이자 왕에게 직접 민원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능행때면 백성들은 행렬 앞에 엎드려 상언을 올리거나 징.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을 하였다. 이에 왕은 직접 백성을 위로하였으며 재난을 당하거나 생활이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였다. 또한 능행 중에는 과거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수도권 방위 상황을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기회도 가졌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국기관. 국기관은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돌아가신 날을 기록한 현판이다. 이 국기관은 영조년간에 제작하였으며 제1대 태조부터 제20대 경종의 기일까지 기록하였다.
산릉제례
조선왕릉에서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해 지내는 산릉제례는 왕이 친히 능에 거동하여 지내는 친향이 원칙이나 대부분 대신에게 향을 전하여 제례를 치르게 하였다. 조선전기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왕릉에서는 사시, 설.추석 등의 속절, 음력 초하루. 보름인 삭망 등에 제례를 지냈다. 또한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재실을 수리할 때에도 제례를 올렸다. 조선 후기에 왕과 왕비가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신제가 산릉제례에 포함되면서 기신제를 중요하게 여겼고, 오늘날에도 각 왕릉에서 기신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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