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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박물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보 (어진,금보,옥책)

younghwan 2010. 10. 3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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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에 위치한 고궁박물관은 조선시대 왕실을 상징하는 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왕실과 관련된 유물들은 주로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의 초상화인 어진, 국왕의 존호를 올릴때 상징물로 사용되는 도장인 금보와 옥책이 있다. 또한 왕의 행적과 궁중의 행사를 정리한 각종 의궤류와 행사 준비물이 있다. 조선시대 천문과학기술 유물들 또한 국왕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기때문에 이 곳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중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로 어보를 들 수 있으며, 이는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왕과 왕비, 왕세자 등의 인장까지도 통칭한다고 한다. 이 어보들은 국장행사의 하나로 존호를 올릴 때 사용했다가 왕의 신주와 함꼐 종묘에 보관했다. 어책은 어보와 함께 올린는 것으로 해당인물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져 있다. 왕과 왕비는 옥으로 만든 옥책을, 왕세자와 비는 대나무로 마든 축책을 올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궁중 문화와 종묘제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의미있는 유물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복제품)이다. 원본은 전주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의 초상화인 많은 어진을 그렸으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태조 이성계 어진(보물 931호), 영조 어진(보물932호), 철종 어진(보물1492호) 있다고 한다. 이마저도 대부분 원본은 아니고 구한말 고종 때 원본을 보고 그린 모사본이라고 한다.


태조임금 금보, 숙종과 고종때 만들어진 것으로 태조의 조선건국 480년을 기념하여 존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제작한 금보이다. 금보는 국왕의 국장때 존호를 올리면서 처음 만들고 후대 국왕에 대한 존호를 새로 올릴때 새로 만들어 올린다고 한다.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보관된다.


태조 임금 옥책. 조선 숙종때 존호를 새로 올리면서 같이 올린 옥책이다. 고대 죽간으로 만든 책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옥에다 금으로 글씨를 썼다.


세종왕비금보, 세종임금 금보


명성왕후 옥보와 문종 세자빈 금인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한 옥인과 죽책. 1759년에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교명을 내리면서 함께 수여한 옥인과 죽책이다. 인장에는 '왕세손인'이라고 새겼으며, 죽책에는 책봉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장조 왕세자빈 책봉 교명. 사도세자 부인인 혜경궁 홍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면서 내린 교명이다.


현종교명함


영친왕을 추봉하는 금책. 구한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의 위상에 따라서 금책을 만들었었다.

어보.어책.교명
어보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왕의 인장을 뜻하나 일반적으로는 왕비, 왕세자 등의 의례용 인장까지도 통징한다. 왕.왕비.세자.세자빈 각각의 덕을 기리는 뜻이 담긴 특별한 이름인 존호를 올리는 의식에 사용했으며 돌아가신 후 종묘에 보관했다. 조선 시대에 존호를 올리는 일은 국가의 큰 경사 때에 행했던 중요한 국가 의례의 하나로, 왕이나 왕비의 생시와 사후에 그 덕을 기리고 찬양하기 위한 행사였다. 어보에는 왕비.세자.세자빈 들의 책봉명, 왕과 왕비의 존호.묘호.휘호 등을 새겼다. 어책은 책봉시 또는 존호를 올릴 때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으로서 보통 주인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 주인공의 지위에 따라 재료가 달랐는데 왕과 왕비에게는 옥으로 만든 옥책을, 세자와 세자빈에게는 대나무로 만든 죽책을 올렸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와 황후의 어책을 금으로 만들어 올렸다. 교명은 왕이 왕비.왕세자.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수여한 문서로서 왕비에게는 옥책과 금보를, 왕세자와 세자빈에게는 죽책과 옥인을 함께 수여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태조이성계 초상. 전주 경기전에 있는 것을 모사한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하였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어진은 왕의 초상화이다. 어진은 선대 왕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보살핌을 받아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 전체가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려졌다. 조선시대에는 태조대부터 손종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어진을 제작하여 진전이라는 특별한 건물에 봉안하였다. 이러한 어진을 그리는 방식으로는 국왕이 살아계실 때 그 모습을 직접 대하고 그리는 경우, 국왕의 생존시에 그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뒤에 그리는 경우, 그리고 어진이 낡았거나 훼손되었을 때, 새로 지어진 진전에 어진을 모시고자 할 떄 이미 있던 원본을 그대로 따라 그려 새로운 어진을 제작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진을 제작할 때에는 업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 당대 최고의 궁중화가들로 하여금 어진을 그리도록 하였다. 이들은 어진에서 국왕의 생생한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인품과 정신까지 느껴지도록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완성된 어진은 임금을 직접 모시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 진전에 봉안하였으며, 배경에는 항상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두었다. 오늘날 전하는 어진은 몇점 되지 않지만 국왕의 당당한 모습을 격조 있는 색채와 정밀한 필치로 묘사하여 군주의 권위와 위엄을 잘 보여준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탄생축하잔치그림 (보물 1413호, 사진)

왕실의 위엄과 제왕기록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한 후 마지막 임금 순종때 일본에 의해 강점된 1910년에 이르기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승계하며 지속되었다.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여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를 펼쳤다. 안으로는 지배계증인 양반을 중심으로 한 신분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밖으로는  주변국들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왕은 강력한 지배체제를 유지해 갈 수 있는 탁월한 인물어야 하며 배우자인 왕비는 이에 걸맞게 덕성과 지성을 갖춘 사름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왕과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실 자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지위를 가짐에 따라 이에 부응하는 교육을 받아 바른 인성을 갖추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소양을 쌓았다. 왕은 많은 권한을 가졌으나 객관적이고 타당한 규율 위에서 권한을 행사 할 수 있도록 법 체계를 정비하였다. 작은 일부터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왕이 행한 모든 일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록 체계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왕은 항시 냉철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명확하고 바른 정치를 펼쳐야 했다. 한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지닌 왕은 마치 태양과 같은 존재였으며 왕권의 상실을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었다. 탁월한 왕의 존재는 국가의 발전을 의미하였으며 그들의 업적은 후손에게 길이 전달되어야 했다. 따라서 왕이 계신 자리에는 항시 왕의 상징물들이 놓여 그의 권위와 정통성을 입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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