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벽골제는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인 저수지로 학창시설 꼭 외어야만 했던 유적지 중 하나이다. 김제 지역을 포함한 전북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 이래로 벼농사의 중심지였다. 벽골제라는 이름 또한 '벼가 나는 골'이라는 우리말에 그 근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김제군의 지명과 유래를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호남평야는 넓은 평야지대의 풍요로움을 뒷면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대변되는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곳으로 삼국시대부터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논에 물을 대어야 하는 어려움과 풍요속에 숨어 있는 수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전군가도로 대변되는 일제의 식량 수탈 또한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김제 벽골제는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백제 비류왕때 처음 둑을 쌓아서 저수지를 만든 것으로 되어 있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4차례의 개축이 일어났고, 조선 세종때인 1420년 홍수로 무너졌다고 한다. 지금은 옛 제방을 따라서 복원한 약 3km 정도의 둑만 남아 있다고 한다. 벽골제는 흔히 볼 수 있는 저수지처럼 골짜기에 둑을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평지에 높은 둑을 쌓아서 만든 저수지로 그 모습이 장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벽골제 중수비와 옛 제방의 수문인 장생거와 경장거가 남아 있다. 김제 벽골제는 일제강점기때 옛 제방을 따라서 동진수리조합에서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만들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특별히 눈에 보이는 유적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쌓은 벼농사를 위한 관개용 저수지로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제 벽골제는 대부분의 시설이 근래에 들어서 복원한 것이지만, 삼국시대에 최초로 만들어진 관개용 저수지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상당히 높은 유적지이다. 옛 흔적으로는 벽골제 수문을 여닫던 장생거를 볼 수 있다.
김제 벽골제 주차장에서 저수지 옛 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 김제 벽골제는 우리나라 벼농사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체험학습관으로서의 역할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벽골제 주위로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비록 옛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벽골제 제방이 있던 자리에 둑이 있어서 옛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벽골제 모형도. 넓은 평야지대이 인공적으로 둑을 쌓아서 관개용 저수지를 만들고 있다. 지금으로 부터 약 1,700년 전인 백제 비류왕 27년 (330년)메 이런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의 토목 기술 수준이 아주 높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벽골제 수문 중 장생거. 벽골제에는 수문이 5개 있었다고 전해지면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수문은 양쪽에 홈이 파인 지주가 있고, 지주의 홈에 나무를 끼고 빼면서 저수지 수위를 조절하고 계절에 따라 논에 물을 공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홈이 파인 장생거 수문 지주
장생거 주변 석축은 대부분 옛 모습처럼 복원한 것이지만 일부는 옛날에 사용했던 석축이 남아 있다.
현재의 벽골제 공원에는 옛수문을 재현해 놓고 있으며, 옛날 방식대로 수문을 열고 닫는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
벽골제 옛 수문인 장생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의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한다. 그 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 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 1980년대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벽골제중수비의 기록에 제방의 단면과 수문구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처럼 바라보였다. .... <출처:김제 벽골제>
벽골제 저수지 둑. 저수지는 없지만 옛모습처럼 약 3km의 둑을 복원해 놓고 있다.
벽골제 둑 너머로 옛 저수지가 있었던 자리에 넓은 평야가 보인다.
벽골제 제방을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동진수리조합에서 조성했다는 관개용 간선 수로가 보인다. 간선수로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농업용 수문도 볼 수 있는데, 옛 모습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벽골제 제방을 허물고 조성한 농업용 관개수로
벽골제 제방
벽골제 제방 안쪽에는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뛰어 놀 수 있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옛날 조선시대에 사용한 농업용 관개시설을 설명하기 위한 작은 정원이 같이 있다.
용두레. 대표적으로 논에 물을 대는 연장인 용두레이다. 기계와 전기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논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둠벙에서 물을 푸어서 논에 물을 대는 연장이라고 한다.
물이 많고 무넘이가 높지 않은 곳의 물을 대량으로 퍼 올리는 연장이다. 흔히 논 한 귀퉁에에는 가뭄에 대비한 구덩이를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둠벙이 있다. 이 둠벙의 물은 어느 정도까지 용두레로 푸고 나머지는 맞두레를 이용해서 퍼낸다. 용두레를 사용할 때는 기둥 3개를 원뿔형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용두리 끈을 매어 앞 뒤로 움직이면서 물을 푼다. 용두레에는 보통 두말의 물이 실리고 두세 사람이 교대하면서 푸면 하루에 1000석 정도를 옮길 수 있다. 통두레, 파래, 품개, 풍개로 부르기도 한다. <출처:김제 벽골제>
무자위. 호남평야 같은 평야지대에서만 사용하는 연장으로 대량으로 물을 퍼올리는 연장이다. 흔히 염전에서 바닷물을 끌어올리는 데 많이 사용하며,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것이 많은 영화나 문학작품 등에서 묘사되고 있다.
무넘이가 아주 얕은 곳에서 대량으로 물을 대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물을 자아 올린다하여 '무자위'라고 부른다. 한 개의 굴대 주위에 여러 개의 나무판을 돌려 붙여 마치 날개달린 바퀴처럼 보인다. 이 나무판을 두발로 번갈아 밟으면 바퀴가 돌아가고 퍼 올려진 물이 붓도랑으로 흘러 들어간다. 지방에 따라서는 자새, 자애, 물자새, 무자새, 수룡, 수차 등으로 부른다. 무자위는 평야지대의 논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특히 염전에서는 근래까지도 볼 수 있었다. <출처:김제 벽골제>
수리시설은 아니지면, 대표적인 물을 이용한 도구인 물레방아
이 곳 벽골제에는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가 있다.
월촌입석.
입석은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재앙을 막아주는 수문신이자,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겨진 큰돌 문화재이다. 입석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남녀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입석에 감아둔 동아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 하여 다음 제사때까지 1년동안 손을 대지 않는다. 이 입석은 사각기둥형 자연석이며 높이는 210cm, 폭62cm, 두께40cm이다.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매년 지평선축제 때 이곳 벽골제에서 입석줄다리기를 재현하고 있다. <출처:김제 벽골제>
벽골ㅈ 입구에 있는 누각
벼베기가 끝난 김제 평야. 낮은 야산만 조금 보인다.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호남평야
김제를 옛 마한시대에는 벽비리국, 백제시대에는 벽골군으로 불렀다. 이는 벼의 골이리난 뜻으로 도향의 이름이다. 이러한 지명의 연유로 벽골제는 우리 고어로 벼골의 둑이 한자로 벽골제라 표기된 것은 이두 표기에 기인한 듯하다. 국내 최고최대의 저수지인 벽골제는 금만평야를 비롯하여 정읍시, 부안군 등 1만 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제방의 길이는 3.3km, 둑의 높이는 5.7m, 상단폭 10m, 하단폭 21m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등 관련 문헌에 따르면 백제 비류왕 27년 (330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4차례의 개축이 있었으며, 1420년 홍수로 무너졌다. 그후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설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의 우리나라의 3대 저수지였던 벽골제는 사적 11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벽골제의 5개 수문중 장생거와 경장거 2 곳의 수문 석주가 남아 있다. <출처:김제 벽골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옛 저수지의 중수비와 둑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그러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고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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