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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용인 심곡서원, 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

younghwan 2011. 4. 1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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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조광조는 14세때 성리학자 김굉필 문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호조,예조,공조의 좌랑, 홍문관 승지,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서 다양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이후 조광조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중종반정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의 역공을 받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후대에 조선사회를 주도했던 사림세력을 추앙을 받았다.

 정암 조광조를 모신 서원은 용인 심곡서원, 서울 도봉서원 등 전국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용인 수지신도시에 위치한 심곡서원은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의 묘소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인 중요성으로 인해서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던 전국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심곡서원은 지금은 아파트숲으로 가득찬 용인 수지의 마을 뒷산에 서쪽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서원이다. 이 서원은 효종 원년인 1649년에 세워졌으며, 입구의 홍살문, 내.외삼문, 강당인 일소당과 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구조를 하고 있다. 지방 명승지에 세워졌던 다른 많은 서원들에 비해서 건물의 규모나 외형에 있어서는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경기도 서원의 형태를 하고 있다.


홍살문, 외삼문, 강당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용인 심곡서원 전경. 뒷산에는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심곡서원 외삼문


심곡서원 현판. '심곡'이라는 현판 이름을 조선 효종 때 국왕으로 하사받은 사액 서원으로 그의 묘소와 가까이 있었던 까닭에 구한말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유생들의 기숙사가 외삼문을 들어서면 보인다. 양쪽 건물 모두 앞면 3칸으 조그마한 건물로 실제로 이 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많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서원의 기능이 교육보다는 제향에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당 또한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그 규모는 일반적인 향교나 대형서원에 비해서 작다고 볼 수 있다. 강당인 일소당은 원래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공간인데, 조선후기에 세워진 이 강당은 주로 제사준비를 하던 유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던 장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강당의 모든 문들은 판문으로 굳게 잠겨져 있는데,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듯 하다.


사당 앞 한쪽편에 있는 책을 보관하던 장서각. 장서각의 규모는 다른 서원에 비해서 큰 편인 것 같다.


심곡서원 제일 뒷편에 위치한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


사당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여져 있지는 않고 있다. 앞면 3칸 정도로 심곡서원에 있는 건물 중에는 원형이 제일 잘 보전되어 있는 건물이라 한다.


심곡서원 사당 전경


사당 옆으로는 서원을 관리하던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인 고직사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양옥으로 지은 살림집이 들어서 있다. 이 서원의 제향기능이 지금까지도 계속 유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원 오른편에는 천원지방을 구현한 작은 연못이 있다.


심곡서원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보호수로 지정된 오래된 고목들이 서원 주위에 심어져 있다.

용인 심곡서원 전경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1519) 때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49)에 세워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강당인 일소당·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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