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묘골마을은 낙동강 동쪽 칠곡군과 경계가 되는 하빈면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마을로 사육신 중 한분인 박팽년 후손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사육신 후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가문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재력이 풍부했던 마을답게 사육신을 모신 사당인 육신사를 중심으로 대부분 큰 한옥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달성 묘골마을은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마을로 큰 한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오래된 한옥은 잘 보이지 않고, 사당인 육신사 근처에 있는 재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인 도곡재가 눈에 띄게 오래되어 보인다. 이 건물은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1778년(정조2)에 주택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9세기에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실로 사용하면서 약간 개조되어 일반 주택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달성 묘골마을 도곡재 사랑채. 원래는 앞면 4칸의 건물이었으나,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에 퇴칸 1칸을 달아서 대청마루를 넓게 만들었다. 집안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왼편 누마루처럼 달아내어 놓은 마루. 대청마루와 연결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인 도곡재 앞 툇마루
사랑채인 도곡채 전경. 안채와는 담으로 분리해 놓고 있다.
도곡재 뒷편. 아궁이 위에 다락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이 가옥은 전반적으로 다락방이 많은 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 오른편에 있는 중문채. 앞면 3칸으로 문간채 2칸을 두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안채에서 본 문간채
'ㄱ'자형으로 이루어진 안채. 안채는 대창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재실로 사용해서 그런지 몰라도 부엌이 보이지 않고, 온돌방 아궁이만 보인다. 오른편 아궁이가 있는 곳에 다락방을 달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앞면 2칸 규모의 안채 대청마루
안채 오른편에 달아 놓은 다락방.
옆에서 본 도곡재 안채
다락방 아래의 아궁이.
안채 마당 오른편에 있는 고방채. 제사에 필요한 물품 등을 보관하던 창고 건물로 보인다. 이 건물에도 다락방을 두고 있다.
외양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공간은 짚단이 보관되어 있는데, 행사에 필요한 멍석, 돗자리등을 보관하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곡재 출입문인 솟을대문
솟을대문에는 작은 문간방과 창고가 있다.
사랑채 대청마루 옆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연못.
연못 뒷편으로 기와를 얹어놓은 창고 건물을 볼 수 있다.
도곡재, 달성군 하빈면 묘리
도곡재는 사육신 중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묘골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1778년(정조2)에 주택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선생이 호를 따라 도곡재라 부르게 되었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문신으로 낙재 서사원을 사사하였고 한강 정구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의 행의가 추앙되었다고 대구읍지 증에 기록되어 있다. 도곡재는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실례를 잘 보여주며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이 3개 권역으로 분리되어 일곽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좌측으로 낸 대문채를 들어서면 남향하여 사랑채에 해당하는 도곡재가 자리하고 사랑채 우측에 연한 중문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안채와 우측의 고방채가 자리하여 튼 구조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인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였으나 후대에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에 퇴칸 1칸을 달아 내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출처:달성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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