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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경주 사천왕사지 (사적8호), 문무왕이 당나라를 물리치고자 낭산에 세웠던 사천왕사 절터

younghwan 2012. 7. 1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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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사적 8호로 지정된 사천왕사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이다. 사천왕사는 679년(문무왕19)에 문무왕이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사천왕사가 위치한 곳은 신라인이 신성시여기던 경주 낭산 남쪽 끝 자락으로 경주에서 울산을 통해 일본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다고 하며,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입구를 지키던 천왕들로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수미산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예언이 실현시켜준 사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사천왕사는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사천왕사 절은 없어지고 남북 105m, 동서 73m의 절터만이 남아 있다. 사천왕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쌍탑식 가람배치를 한 첫번째 사찰로 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중문지, 북쪽에는 강당지가 있다. 현재 사천왕사는 발굴 및 복원작업이 다시 한번 진행 중이며, 절터에는 머리가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사천왕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을 위해 지었던 사찰로 볼 수 있으며, 이 사찰에 있던 문무왕 비(碑) 상단부가 최근에 경주의 주택 마당에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천왕사는 황룡사, 불국사와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큰 사찰로 건물 지붕에 사용했던 치미를 비롯하여 기와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인상적인 것이 통일신라를 대표할 수 있는 천재 조각가이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녹유사천왕상이 있다. 녹유사천왕상은 그 이전과 이후의 조각작품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의 간다라 미술품의 조각수법과 비슷하게 상당히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천왕사에 세워진 2개의 탑 또한 상당히 뛰어난 작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사천왕사 절터. 여러차례 발굴작업이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 다시 이 절터를 다시 발굴조사하고 있다.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사천왕사의 동쪽편 건물터. 발굴작업 중이라 건물터에 대한 정확한 설명과 각 건물터들을 자세히 볼 수 없어서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건물터 규모로 볼 때도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이 금당터이고 앞쪽에 두개의 탑이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 건물터를 발굴조사하고 있는 모습. 절터 뒷편에 있던 강당 건물터를 발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찰 발굴조사 현장


사천왕사 절터 앞쪽에서 본 모습


2012년 사천왕사 발굴.조사 모습. 발굴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사 중심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목탑과 금당터가 있던 부분


주춧돌이 놓여 있는 건물터


사천왕사 절터 중 사찰입구 부근 발굴모습


발굴현장에서 볼 수 있는 건물 주춧돌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


사천왕 앞쪽편 건물터 발굴 현장. 사찰 출입문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건물터를 상당히 깊이 파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2011년). 도로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귀부가 보인다. 귀부의 높이가 원래의 높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2012년 발굴조사가 일부 마무리가 되었는지 발굴 현장을 덮어 놓고 있다.


2012년 봄 사천왕사 입구에 있는 건물터 발굴 현장


사천왕사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 남쪽편 입구. 사천왕사 당간지주가 옛절터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세워져 있다.


사천왕사 입구에 세워진 당간지주는 그 조각수법이나 조형미는 빼어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당간지주라 전해진다.


사천왕사 절터 남쪽편에 있는 망덕사지


사천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 비(碑). 이 것은 비석의 하단부로 조선 정조 20년(1796)에 경주부윤 홍양호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비석의 상단부는 2009년 경주 민가에서 새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문무왕 비(碑),
문무왕 비는 681년 혹은 682년에 사천왕사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졌던 문무왕 비를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던 홍양호가 재발견하고 경주 관아로 옮겼습니다. 이 때의 탑본이 '해동금석원'이라는 청나라 책에 실렸습니다. 이 비석은 또 다시 행방을 알 수 없다가, 1961년에 여기 전시된 비편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른 한 편이 2009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비문의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와 신라 김씨의 내력 등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국학소경 김__이 썼으며, 구양순체의 해서는 단아하고 활달한 느낌을 주는데 대사 한눌유가 썼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유물중 가장 인상적인 녹유사천왕상. 동시대에 활약한 조각가이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그 조각수법이 매우 사실적이고, 중앙아시아 간다라 미술품의 조각수법과 유사하다.


경주를 대표하는 문양인 도깨비문양이 새겨진 기와.


건물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거대한 치미. 치미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궁궐건물이나 사찰 불전 건축에 많이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에 주로 사용한다.


사천왕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 파편들.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문양들로 장식하고 있다.


사천왕사 뒷편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겼던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낭산 정상부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 사이에는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부설하여 그 맥을 끊고 있다.


경주 사천왕사지 (사적8호), 경주시 배반동 935-2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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