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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실] 경주지역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 유물 (고선사지, 영흥사지, 임천사지)

younghwan 2012. 7. 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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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신라는 불교가 제일 늦게 전래되었지만, 법흥왕대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신라의 불교은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하여 불교를 통해 국민을 단합시키는 역할이 컸다다. 호국불교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 사천왕사의 건립 등을 들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삼국의 불교문화가 융합되어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신라 천년이 수도였던 경주에는 지금도 불국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찰들이 남아 있지만, 전성기에는 상당히 많은 사찰들이 국가를 비롯하여 귀족집단들이 주도하여 세워졌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칠처가람이라 불리는 흥륜사, 담엄사, 영흥사, 분황사, 사천왕사, 황룡사, 영묘사 들이 있었으며, 삼국을 통일한 이후 화려한 불교예술을 보여주는 불국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 또한 경주남산 자락에는 이름을 알 수 많은 절들이 들어서 민간들과 함께 시대를 살아왔었다. 통일신라가 멸망한 이후 경주에 있는 많은 사찰들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력이 부족했던 까닭에 불구사를 제외하고는 도심 부근에 있던 대부분의 사찰들은 신라 왕실과 귀족세력의 몰락과 함께 폐사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경주에서는 많은 절터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일부는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도 있다. 경주박물관 야외에는 경주 알천 상류의 덕동댐 건설로 수몰된 고선사 절터에 있던 유물들과 경주 도심에 위치한 칠처가람 중 하나인 영흥사 절터, 알천부근 임천사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고선사 절터에서 옮겨온 석조유물들. 고선사 절터는 현재 덕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고 한다.


고선사 절터에서 옮겨온 건축부재들


고선사 절터에서 가져온 비석받침. 원효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화상비를 받치고 있던 비석받침이다.


서당화상비, 경주 고선사 터 출토된 원효대사를 기르는 비석이다. 9세기초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고선사 절터에서 옮겨온 국보 38호로 지정된 고선사지 삼층석탑. 석탑의 모양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신라 이후 석탑의 형태가 불국사 삼층석탑 (석가탑)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한 중간 단계의 석탑이다.

고선사
고선사는 원래 알천 상류인 경주시 암곡동에 있던 절로, 현재 이 곳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머무르던 곳이라고 합니다. 1914년 5월 원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어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 이전에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에는 현종 12년(1020) 고선사의 금란가사와 불정골 등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절은 법통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75년 이 절터를 발굴하였는데,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 터를 확힌하였고, 금동불, 기와, 전돌 등 많은 문화재를 찾아 내었습니다. 여기 있는 석탑과 금당터, 비각터의 지대석과 비석받침은 절터에서 옮겨온 것들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영흥사터 출토 석조 유물


영흥사는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신라의 사찰로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인 천경림에 지었던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이 절은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유사 기록에 법흥왕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되어 영흥사에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법흥왕대에 있었던 사찰로 보인다.


영흥사 절터가 있었던 자리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원래 영흥사 절터가 있었던 자리라서 그런지 주변에는 오래된 주택만이 남아 있다. 현재는 옛 절터의 건물이 있었던 자리를 확인해 볼 수는 없고 유물들만 학교 운동장과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임천사터 출토 석조 유물


임천사는 경주사 동천동 헌덕왕릉 남쪽에 있던 사찰로 성덕왕대에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절터에 있던 석재와 초석 등이 1991년 태풍으로 일부 유실되어 현재는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임천사 절터 출토 석탑 지붕돌


임천사 철터 출토 유물


임천사 절터가 있었다는 헌덕왕릉 남쪽 제방 일대


승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경주 승복사터, 통일신라 9~10세기
두마리 거북이 붙어 있는 이 비석받침은 경주 외동읍 말방리 승복사터에 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골짜기 곡사(승복사)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써 승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 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받침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승복사 외에도 경주 배리에 있는 창림사터와 경주 암곡동 무장사 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비석과는 달리 쌍거북 받침일까요?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절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승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고,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무열뢍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왕실과 관련된 비석을 좀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지 않았을까요? <출처:경주박물관>


돌다리 난간들


기단석


목조건축물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


목조건축물에 사용되었던 석재들


받침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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