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산사지는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남아 있는 옛 절터이다. 굴산사는 통일신라후기 범일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크게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후기 선종을 크게 전파한 구산선문 사찰 중 하나이다. 범일국사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굴산사에서 40년동안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고 전파하였다. 구산선문은 기존 교종의 교리 중심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주는 본래 의미를 전한다는 선종의 성격을 갖고 있다. 통일신라말기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의 지원을 받아 크게 유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의상대사의 화엄십찰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불교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굴산사는 후삼국시대 세력균형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했던 강릉지역 호족들의 지원을 받았던 사찰로,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 또한 이 지역 호족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굴산사는 고려시대 호족의 지원을 받아 크게 번창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강릉시 남쪽편 백두대간 중 하나인 사굴산 자락에 창건된 굴산사는 실제로는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산중 사찰은 아니고, 동해안에서도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는 강릉 남쪽 지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창건되었던 사찰로 보인다. 굴산사 절터 대부분은 지금은 농지로 사용되고 있기때문에 정확한 사찰규모와 영역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최근에 발생한 수해로 절터의 일부분이 발굴조사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굴산사 절터임을 알 수 있는 유물로는 사찰입구에 세워졌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보물86호)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것으로 알려진 승탑(보물85호)와 석조불상 등이 남아 있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마을 뒷편에 남아 있는 굴산사지 절터(사적 448호). 이 곳 또한 원래는 농경지로 사용되었기때문에 정확한 절터의 형태는 알 수 없었으나,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로 절터의 일부가 드러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절의 크기는 동.서 140m, 남.북 250m 규모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발굴조사 결과 법당, 승방, 회랑, 탑이 있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굴산사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거의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은 마무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굴산사 절터 발굴 현장
굴산사 절터 뒷편 언덕에 남아 있는 굴산사지 승탑(보물85호). 이 승탑은 굴산사를 세운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팔각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가운데 받침돌에 악기를 연주하는 조각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윗받침돌은 연꽃모양을 새겨놓고 있다.
절터 한쪽편에 남아 있는 작은 샘인 석천.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스님의 탄생설화가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굴산사지, 사적 448호,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이 곳은 신라 선종 9산 중 사굴산파가 시작된 절인 굴산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굴산사는 신라후기 범일 스님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범일스님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굴산사에서 40년을 보내는 동안 신라의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3대 임금으로부터 국사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오로지 불법을 공부하고 전파하는데 힘썼다. 굴산사가 언제 창건되고 폐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던 절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절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변에 위치한 유적과 유물을 볼 때, 그 범위가 매우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와 범일스님의 사리탑이라 전해지는 부도, 돌부처상 3구 및 많은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다. 또한 범일스님이 태어났을 때의 전설이 깃든 석천과 학바위가 있다. 굴산사지는 강원도 영동지방의 옛 불교 신앙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출처:강릉시청>
사찰 입구임을 알려주는 굴산사지 당간지주. 보물 86호로 지정된 이 당간지는 화려한 장식이나 조각 등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당간지로 소박하면서 웅장한 느낌을 준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굴산사지 당간지주, 보물 86호,
신라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귀가 멀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사찰 앞에 세워지며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 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뽀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출처:강릉시청>
굴산사는 백두대간의 산자락이 동해안의 넓은 평야지대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부근은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으로 농업경제력을 바탕으로 호족의 지원을 받아서 굴산사가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굴산사지 뒷편의 백두대간
굴산사 절터에서 약간 떨어진 농가에 위치하고 있는 굴산사지 석불좌상. 원래 3구의 석불좌상이 있었다고 하며, 2구는 인근 암자에 있고, 1구만이 이 곳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석불의 화려한 조각수법은 보이지 않고, 둥글고 긴 얼굴, 평면적인 신체, 투박한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석조불상으로 보인다. 비로자나불의 손갖춤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나머지 2구의 불상과 함께 비로자나불 삼존불인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 지붕돌을 얹고 있으며, 얼굴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조각수법이 투박한 느낌을 주면서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없는 불상으로 당시 이 지역 불상 조각의 경향을 보여준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임을 보여주는 손갖춤
굴산사지 석불좌상
굴산사지 석불좌상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 절터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이곳에 있는 3구의 석불 가운데 완전한 2구는 근처의 작은 암자에 있고, 머리부분이 없어진 1개는 우물가에서 발견되어 이곳에 모셨다. 이는 비로자나불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비로자나불 삼존불을 모신것으로 생각된다. 얼굴은 둥글고 긴 타원형이며, 어깨는 움츠린 듯하다. 옷의 표현이 두꺼워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으며, 가슴 부근에 있는 손의 모습은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이 불상은 둥글고 긴 얼굴과 평판적인 신체에 곡선적인 조각 등 고려 전기에 유행한 자연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역적 특색을 담고 있다. <출처:강릉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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