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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읍성은 남해안의 작은 읍성으로 전형적인 읍성을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왜구의 침입시 주변의 주민들이 읍성에서 2~3일간 피신할 수 있는 소규모 방어기능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적합한 규모로 축성되었습니다. 이 웅천읍성는 조선중기 삼포 중의 하나인 제포를 관리하던 읍성입니다. 아마 왜인들이 언제 말썽을 피울지 몰라서 읍성을 쌓고 관리하였던 것 같습니다. 일본도 네델란드와 무역을 할 때 나가사키 앞에 오란다마을을 만들어 거기에서만 네델란드 사람이 거주하게 하였고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는데 아마 이런 삼포의 사례를 적용한 것 같습니다.
웅천읍성은 오래된 읍성이기는 한데 관리가 잘 안된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읍성에 비해서 성벽이 좀 부실합니다.
삼포: 조선 초기 일본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가하였던 남동해안의 세 포구(浦口). 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또는 富山浦),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鎭海市)에 해당하는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또는 乃而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말한다. 부산포진은 동래현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었으며 1488년(성종 19)에 성을 쌓았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다스렸다. 웅천의 제포진은 웅천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었으며 수군첨사(水軍僉使)가 다스렸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명 있었다. 울산의 염포진은 울산군 남쪽 23리 지점에 있었고 본래 수군만호가 다스렸는데 삼포왜란 뒤에 진을 폐지하였다.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던 이들 지역을 조선초기부터 다스려 세종 때에는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을 정벌하였다. 그 뒤 부산포를 개항하여 왜인들의 거주를 허락하고 왜관(倭館)을 설정하였는데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출처: 야후백과>
웅천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종 16년에 처음 축성되었다. 장방형 석축서으로 기단부를 이중으로 조성하고 자연대석을 사용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또한 동서남북의 정방에 옹성형 문지를 두었으며 각 문지의 좌우와 성곽의 네모퉁이에 곡성과 적대를 둔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를 보이는 성이다. 웅천읍성은 중종조의 삼포왜란과 선조조의 임진왜란으로 한때 함몰되기도 하였으며 현성으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은 문종조에 웅천현으로 승격된 이후 부터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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