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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강화 교동읍성, 삼도수군통어영 겸 교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읍성

younghwan 2011. 11. 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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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주산인 화개산을 중심으로 여러 섬들을 연결하여 넓은 간척지로 이루어진 섬이다. 북쪽으로는 북녁땅인 연백평야와 마주 보고 있으며, 한강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한강조운과 군사적인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시대와 고구려때에는 고목군현이라 불렀으며, 광개토대왕이 이 곳 교동도에 화개산성을 쌓고 한성백제를 압박했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으며, 병자호란으로 청의 압박이 심했던 인조때 남양에 있던 경기 수영을 교동도로 옮기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와함께 경기.충청.황해도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면서 교동도호부 부사가 이를 겸직했다고 한다. 삼도 통어사는 관직으로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겸임하였다.

 교동읍성은 1629년 교동도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관아가 있었던 곳에 쌓은 읍성이다. 둘레 430m, 높이 6m의 석성으로 동.남.북 3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교동읍성을 쌓았던 석축과 문루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남문이 유랑루의 홍예와 주변의 석축 일부만이 남아 있다. 교동도는 고려,조선시대에 수도와 가깝고 육지와 떨어져 있었기때문에 주로 왕실인사들을 이 곳으로 유배보냈다 하며, 읍성내에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이 머물렀던 연산군적거지가 있다. 이외에 고려 무인정권에 의해 폐위된 희종 등이 교동도로 유배왔었다고 한다.



홍예만 남아 있는 교동읍성 남문. 읍성으로 쌓았던 석축 대부분은 무너지고 남문 주변에만 일부 남아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 볼 때 남문의 홍예도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교동읍성 남문 주위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 석재를 이용해서 석축을 쌓고 있다. 조선후기에 쌓은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일반적인 석축은 크고 작은 돌을 촘촘하게 메워서 쌓고 있는데, 석축을 쌓는 방법에 있어서 고구려 산성을 쌓았던 형식이 많이 남아 있어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강화지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읍성 남문 동쪽편 석축.


고구려산성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돌들을 촘촘히 쌓은 석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북받침돌이 남문 앞에 있다.


교동읍성 남쪽으로는 석모도와 교동도 사이의 수로가 있다. 이 곳에 삼도수군의 선박들이 정박해 있으면서 훈련도 하였다고 한다.


교동읍성 남문 홍예.


문루가 있었던 남문 내부.


문루 내부의 석축. '南樓'라고 적힌 글자가 보인다.


읍성 안쪽에서 본 남문


읍성 안쪽 석축에서는 이곳에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三道'라고 적힌 글자를 볼 수 있다.


교동도후부 관아가 있었던 읍성 내부는 작은 시골마을로 변해 있다.


교동읍성 남문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던 교동읍성 남쪽 남산포 선착장.


교동읍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읍성 뒷편에 위치한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에는 화개산성을 쌓아서 대비하였다고 한다.


화개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교동읍성과 남산포 일대. 교동읍성이 있는 마을의 형태로 볼 때 반달모양으로 읍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교동향교 입구 마을에 세워진 읍내리 비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들은 교동면 관내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1년도부터 강화군 및 교동유림에서 이 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문 홍에만 남아 있는 교동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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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읍성,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
조선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돌로 쌓은 읍성이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을 유랑루, 북문을 공북루라 하였다. 영조 29년(1752) 여장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남문을 다시 고쳤다. 동문가 북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문만 남아 있다. <출처:강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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