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각도 수군을 지휘하기 위해서 정3품 외관직인 수군절도사를 두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경상.전라.함경도에 각 3명, 경기.충청.평안도에 각 2명, 강원.황해도에는 각1명을 두었다고 한다. 대부분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겸임했기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경상.전라에 각2명, 경기.충청에만 각 1명씩 독립된 정직의 수군절도사가 있었다. 수군절도사가 머물던 곳에는 수영이 설치되었는데 동래, 거제, 여수, 교동, 보령, 옹진 등이 유명한 수영이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각도의 수군을 통괄 지휘하기 위한 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설치되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한강하구를 지키기 위해서 강화도 교동도에 경기.황해.충청 수군을 총괄지휘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었고, 교동도호부 부사가 이를 겸임하였다.
한강이 서울을 지나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교동도는 그리 큰 섬은 아니지만, 한강 조운을 관리하고 유사시 바다로부터의 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 국방상 아주 중요한 요지로 삼국시대 이래로 별도의 행정기관이 교동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만주에서 등장한 청나라 세력에 위협을 느낀 조선은 고려때 대몽항전의 예를 참조하여 강화지역의 방어를 강어하기 위해서 남양(화성)에 설치되어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도로 옮기면서 경기.충청.황해도 수군을 통합지휘할 삼도수군통어영을 교동도에 설치하면서 교동현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때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된 곳이 교동읍성 남쪽편 남산포이다. 지금의 남산포는 조그만 시골어항으로 정박하고 있는 선박도 그리 많지 않은 편으로 옛 수영의 흔적으로는 정박시 배를 묶어두던 개류석 1개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한강하구 조운을 관리하기 위한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었던 자리. 삼도수군통어사는 교동도호부 부사가 겸임하였으며, 관아는 교동읍성내에 있었으며 이 곳에는 수군에 소속된 군함들이 정박했던 장소이다.
삼도수군통어영지
조선 인조 7년(1629)에 한성 방어를 위하여 남양 화량진에 설치되어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다음, 인조 11년(1633)에는 3도(경기, 황해, 충청) 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 서쪽 해안에 설치하였다. 이 곳에는 수군을 훈련하던 훈련장 및 정박시 배를 묶어두던 개류석 1기가 현존하고 있다. <출처:강화군청>
강화 남쪽 석모도를 마주보고 있는 교동도 남산포 선착장. 조선시대에는 규모가 큰 항구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조그만 어촌마을로 남아 있다.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남산포선착장. 이 곳에서는 강화도 바깥쪽 바다를 통해서 들어오는 선박들을 감시하고, 먼바다로 쉽게 나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산포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작은 어선들
남산포 선착장 뒷편에 있는 작은 동산. 주변에 장애물이 없어서 먼바다를 감시하기 좋은 위치였던 곳으로 보인다.
남산포에는 고려때 송나라 사신이 해로를 이용하여 배로 왕래할 때에 교동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무사태평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당집인 사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남산포에서 안쪽으로는 교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읍성이 있었고, 그 뒷 화개산에는 읍성의 방어기능을 보완하기 위한 화개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남문 홍예만 남아 있는 교동읍성
화개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강화읍성과 남산포.
남산포 선착장 풍경
교동읍성 남쪽편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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