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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강화 홍릉(사적 224호), 무인정권기 대몽항전을 이끈 고려 23대 고종의 능

younghwan 2011. 11. 2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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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의 주산인 고려산 남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23대 고종의 능인 사적 224호로 지정된 강화 홍릉이다. 고려 고종은 최충헌 집권기에 왕위에 올라 대몽항전을 거치면서 몽고에 항복하기까지 약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고종은 최충헌 일가가 집권하던 시기였기때문에 실권없었던 최씨정권을 몰아내고 몽고와 강화를 했던 그해에 죽어서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화에 묻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의 재위기에는 무신정권기란 어려움도 있었지만 몽골이 동아시아는 물론 중동과 서구까지 그 영향을 미쳤던 세계사적으로도 격변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고려도 거란.몽골 등의 침입을 받아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유산의 손실도 상당히 컸던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적인 업적을 남겼던 시기이기도 하다.

 강화읍 서쪽의 고려산 능선에 위치한 홍릉은 원래 높게 3단으로 축대를 쌓은 전형적인 고려 왕릉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봉분이나 왕릉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원래 제일 아랫단에는 정자각이 있었다고 하며, 2단에는 문인석, 3단에는 봉분이 있는 고려 왕릉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현재는 봉분과 석물, 3단의 축대만 남아 있어서 어려웠던 대몽항쟁기 고려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강화읍 국화리 고려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23대 고종의 능인 홍릉이다. 봉분과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강화 홍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강화읍에서 내가면으로 넘어가는 국도에서 고려산 중턱에 위치한 강화 국화리학생야영장 입구까지 자동차로 들어갈 수 있고, 이 곳에서 산길을 따라서 약 600m 정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고려산 중턱에 위치한 홍릉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군부대 유격장을 본떠서 만든 학생야영장 체험시설들을 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고려산 정상.


입구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홍릉의 재실로 보이는 건물을 볼 수 있다. 원래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맞배지붕을 한 3칸짜리 작은 건물과 출입문만 있다.


홍릉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가을이라 낙엽이 깔려 있는 꽤 운치있는 언덕길이다.


홍릉으로 올라가는 길 중 중간쯤에 해당하는 곳에 내려다 본 풍경.


멀리 홍릉이 보이기 시작한다.


홍릉 입구.


홍릉은 3단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 왕릉의 형식을 하고 있다. 축대의 상당부분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복구한 것이라고 한다. 축대를 쌓아서 넓은 공간을 마련한 첫번째 단에는 정자각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왕릉에서는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을 두고 있지 않다.


제단이나 석물을 놓여져 있는 2번째 단. 석물들은 생김새가 전부 문인으로 보여서 문.무인석이라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제단이 석상. 뒷편에 고려 고종의 왕릉이라는 표지석만 있었던 것 같다.


왕릉 앞에는 문신으로 보이는 4기의 석상들만 있을뿐 석마, 석양, 석호 등의 석물들은 거의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석상의 조각수법또한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봉분은 난간석이나 병풍석 등 어떤 장식도 하고 있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을 묻은 봉분처럼 보인다.


봉분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꽤 아름다운 편인데, 사진으로는 잘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


봉분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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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홍릉, 사적 224호,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이 곳은 고려 제23대 고종(1192~1259)의 능이다 왕은 강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고 비는 제21대 희종의 딸인 안혜태후이다. 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최충헌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고종 6년(1219)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으매 왕은 제구실을 못하다가 고종 45년(1258)에 유경, 김준 증이 최의(최우의 손자)를 죽이자 왕에게 대권이 돌아왔다. 왕이 재위시에 북방의 민족들이 침입하여 그 어려움이 컸었는데 고종 3년(1216)에는 거란족이 쳐들어와 김취려, 조충 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 후 고종 18년(1231) 몽고족이 쳐들어오자 다음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이곳을 강도라 하고 몽고족에 대항하였다. 몽고병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불타 버리자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 사이에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조판하니 이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8만대장경으로 민족문화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고종은 몽고군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 내면서 강화를 이룩하려고 고종 46년(1259) 태자 전을 몽고에 보낸 후 그 해에 승하하매 개경에 옮기지 못하고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이다. <출처:강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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