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시계(water clock)는 물을 채운 용기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일정한 속도로 물을 흘러내려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시계로 해시계(sundial), 별시계와 더불러 가장 오래된 시계중 하나이다. 물시계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소포타마아와 이집트에서는 BC 1,600년 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도 물시계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과 인도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어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434년 세종대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대표적인 물시계이다.
서양의 물시계
현존하는 가종 오래된 물시계의 수조는 이집트 상왕조 시기인 Amenhotep III (BC1415~1380)때 만들어진 물시계의 수조로 이집트 룩소르의 Karnak 시전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하며, 기록상으로는 그 이전에도 사용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집트 마케토니아 왕조시기인 BC 320년경에 사용된 물시계의 수조 파편이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모든 물시계와 마찬가지로 주로 해가 없는 밤동안에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여 신전의식의 시간을 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물시계가 발견된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타크신전. 주로 신전에서 거행되는 종교행사의 정확한 시간을 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현재 이집트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의 메소포타미 지역에서는 현존하는 물시계 유물은 없고 점토판에 물시계 사용에 관란 기록이 남아 있다. 메소포타미에서는 주로 천문 천문관측의 계산을 위해서 물시계를 사용했다고 하며, 물이 흐른 양을 눈금으로 표시하는 이집트와는 달리 흘러내린 물의 무게로 시간을 측정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는 기록에 의하면 BC4세기경에 물시계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주로 관개수로에 공급할 물의 양을 결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며, 후대에는 이슬람지역의 기도시간 등을 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후대 그리스와 로마, 인도, 중국 등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물시계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형태와 원리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자격루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체로 자동시보 장치와 연결되는 복잡한 기계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아테나의 고대 아고라박물관에서 소장.선시중인 BC5세기경에 사용된 토기로 만들 물시계이다. 수조의 형태에 있어서 자격루와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사진출처:위키백과>
조선시대 이전의 물시계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718년(성덕왕 17)에 신라에서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고, 누각박사와 천문박사를 두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는 백제사람이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일본에 누각을 만들었다는 것과 대체적인 문물의 전파경로 등으로 볼 때 백제나 고구려에서 먼저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전적인 물시계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물이 흘러나간 양을 측정하는 방법과 물이 흘러들어 온 양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확한 측정을 위하여 물이 흘러들어온 양을 측정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표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 중국의 방식을 계속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자격루, 세종대에 만들어진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물시계
자격루는 1434년(세종16)에 장영실.김조.이천 등이 제작한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물시계이다. 자격루는 물을 내려보내는 2~3단의 파수호와 물을 받는 수수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낮과 밤에 교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물을 받는 수수호와 중간의 파수호는 각2개씩으로 이우러져 있으며, 자동시보를 위한 기계장치와 시간을 알려주준 종,북,징소를 내는 시보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자격루에서 시각을 측정하는 원리는 수수호에 물이 차면, 부표처럼 떠오르는 잣대가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는 그 곳에 있는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주고 그것들이 여러 기계창치를 거치면서 종,징,북을 울린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이천, 장영실 등이 만들어서 경복궁 경회루 앞 보루각에 설치한 보루각 자격루를 문헌을 고증하여 복원한 물시계로 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물시계는 누각 위에 물을 공급하는 3단의 파수호(왼쪽 상단)를 올려놓고 중간에 2개의 수수호(가운데), 자동시보장치를 동작하기 위한 각종 기계장치(오른쪽 하단), 기계장치에 의해 징,북,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보루각 자격루의 가장 큰 특징인 물의 흐름에 따르 측정한 시간을 복잡한 기계장치에 의해서 인형이 종,북,징을 울려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시보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시보장치가 워낙 복잡해서 인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1455년(단종3)에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하며, 그 후 중종대에 이를 개량하였다고 한다.
국보 229호 자격루
세종대인 1434년에 만들어진 물시계인 자격루는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복잡한 기계장치였던 까닭에 실제로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1455년(단종3)에 철거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고 한다. 1438년(세종20) 경복궁 흠경각에 설치했던 종이로 만든 물시계 또한 불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덕수궁에 남아 있는 국보 제229호 자격루는 1536년(중종31)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는 자격루를 1/2로 축소한 물시계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자격루인 덕수궁에 있는 자격루는 1536년(중종31)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른 물을 받는 수수호와 2단의 파수호가 남아 있다. 중종대의 물시계는 2단의 파수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자격루는 창경궁 명전전 뒤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하며, 원래의 돌받침대는 명전전 뒤에 남아 있다.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정전 뒤에 2개가 남아 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 전시중인 자격루. 덕수궁에 있는 자격루와 비슷한 시기인 중종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며, 원형을 1/2로 축소한 것이다.
보신각 종
조선시대에는 종을 울려서 일반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는데 도시의 경우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사람의 출입이 많은 성문 근처에 사찰에서 사용하던 범종을 옮겨서 사용했다고 한다. 경주의 에밀레종을 비롯하여 많은 범종들이 성문 종루에 걸려서 사용했던 것이다. 한양에서는 종로의 종루인 보신각 종소리가 시간을 알려주었다. 시골 같은 경우는 별도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는 없었지만, 사찰의 예불 소리를 알려주던 범종이 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공식적인 시각을 알려주던 범종이 걸려 있는 보신각. 오랜 세월 동안 한양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보신각종은 현재 그 수명을 다하여 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사찰에서 시간을 알려주던 범종과 법고.
중국의 물시계, 비루(碑漏, Beilou)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천문학 연구에 있어서 물시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원전 6세기 서주시대에 물시계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기원전 2세기에 흘러내린 물을 양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대에는 물의 증발에 따른 오차를 줄이기 위한 측정을 하거나 동결을 방지하기 위한 시도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중국의 물시계는 세종대의 자격루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명대에 만들어진 물시계가 남아 있다.
중국에서 물시계를 운영하는 체제는 우리나라와 큰 차이는 없어 보이며, 그 작동원리 또한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성문을 열고 닫거나, 북경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주민들에서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 고루와 종루를 운영하고 있으며,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 고루내에 물시계인 비루를 설치해 놓고 있다. 중국 북경 자금성 북쪽편에 위치한 시작을 알려주던 시설인 고루에는 표준시를 정해주던 물시계인 비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진품은 아니고 문헌에 나타난 내용을 고증하여 복원한 것이다. 물시계의 물통은 3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자격루와 비슷하지만 자격루는 항아리나 원통형인데 비해서 중국 비루는 금속모양이 나타나는 육면체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곳에서도 고증을 통해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 돌아가지는 않고 있으며, 모형으로서 의미만 갖는다. 우리나라 자격로도 복원후 그렇게 성공적으로 돌아갖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물시계를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을 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루 내부에 있어서 그런지 자격루처럼 웅장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북경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고루와 종루. 물시계인 비루가 설치된 고루에서 일정시간마다 북을쳐서 종루에 알려주면 종루에서 종을 울려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준다.
북경 고루내에 설치된 비루. 우리나라의 자격루에 비해서 웅장한 면은 없지만, 삼단의 파수호와 시간츨 측정하는 자가 설치된 수수호, 시보를 작동하는 기계장치와 소리를 내는 시보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3단으로 이루어진 파수호(왼쪽), 자가 설치된 물을 받는 수수호(가운데),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치
일정시간이 되면 사람이 북을 울려 종루로 시간을 알려준다.
* 자료참조: 1.고궁박물관
2. 네이버백과
3. 위키백과
4. 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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