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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정조때 문신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다. 그는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저서로는 그의 유배생활 중에 저술한 <목민심서>,<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이 포함된 <여유당전서> 등이 있다. 정약용 선생은 현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으며, 정조때에 벼슬길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겨 놓고 있는데 당시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시 사용한 한강 부교를 만든 것을 비롯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여 수원화성을 축성하는데 사용하는 등 과학적 지식과 식견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사후 노론의 표적이 되어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그의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되어 18년간 전남 강진 등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가 유배생활을 주로 했던 곳으로는 그의 외가인 고산 윤선도 고택이 있는 해남의 녹우당과 가까운 강진만 기슭의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강진만을 내려보고 있는 곳으로 생전에 그가 살았던 남양주의 집인 여유당 뒷동산과 비슷한 분위기를 주는 곳으로 고향 생각을 하면서 그 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 선생의 묘역또한 한강을 내려다 보는 남양주 다산유적지 뒷동산에 자리잡고 있다.

1. 남양주 여유당,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던 집


남양주 팔당댐 부근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중에서 살던 집인 여유당이다. 'ㄱ'자 형 안채와 대문과 행랑채와 붙어 있는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 이 저택은 중부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의 '-'자형으로 생긴 크지 않으면서 앞,뒤로 문이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안채는 'ㄱ'형으로 되어 5칸규모이다. 건물 자체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의 여유당 건물은 당시의 건물은 아니고 1986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다산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집이라고 하는데 생가가 맞는지는 설명이 잘 되어 있지 않아 헷갈리는 부분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높은 벼슬을 했던 사람이지만 이 건물은 그런 느낌은 주지 않는 평범하면서 잘 만들어진 집으로 보인다.


'ㄱ'자형의 된 남양주 여유당의 안채는 앞면 5칸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 3칸은 마루, 2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안채 마루가 상당히 넓은 구조로 되어 있다.


앞면 5칸으로 이루진 다산 정약용 선생이 주로 머물렀던 공간인 사랑채는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다. 1개의 큰 방과 2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내부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손님 맞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2. 창덕궁 궐내각사(규장각)


정조대왕 재위 시절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이 많은 창덕궁 궐내각사에 있는 규장각

3. 수원화성,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개발한 거중기를 사용해서 쌓은 대표적인 성곽


수원화성은 조선후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그 무덤을 현재의 융건릉으로 옮긴후 인근에 건설한 신도신인 화성을 건설하면서 세운 성곽이다. 기존에 화강암으로만 쌓던 축성양식에서 벗어나 석축으로 쌓은 석성과 구운벽돌로 쌓은 전성의 형태를 지형과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섞어서 축성하였다. 축성 공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것을 응용한 거중기가 사용하였으며,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성곽으로 그 축성과정이 의궤 등 다양한 자료에 상세히 남아 있고, 조선의 성곽 축성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산유적지 앞 도로에 전시된 거중기(복제품)

4. 강진 다산 초당,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서 <여유당전서>를 완성한 곳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은 강진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만덕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초당이다. 지금의 건물은 50년대 다산유적보존회에서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하며, 앞으로 원래의 모습인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라 한다. 이 곳 강진의 다산초당은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가장 오랜기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다산의 외가에서 마련해 준 거처라 한다. 다산은 녹우당의 주인이자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증손자로서 녹우당이 있는 해남은 이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서 다산의 실학사상을 정리하고 많은 책을 집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곳 다산초당에서 내려다 보는 강진만으로 풍경은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다산 생가가 있는 양수리 부근 한강의 풍경과 조금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다산이 고향과 비슷한 곳에 터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직접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 정석.


다산초당 앞 뜰에 있는 직접 차를 달였다는 '청석'


다산초당 왼쪽에 있는 자그마한 연못. 다산 선생이 직접 조성했다고 한다.


다산초당 아래에 있는 귤동마을

5. 강진 다산초당 천일각, 고향생각이 날 때 강진만을 내려다 보던 곳


다산초당에서 연못을 지나면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던 사랑채 역할을 했던 동암이 있고, 동암을 지나서 조금더 걸어가면 강진만이 내려다 보인는 작은 정자인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에서는 강진만 바다와 바다건너 칠량과 천관산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보는 강진만은 넓은 바다는 아니고, 다산의 고향이자 생가인 양수리 부근 한강변의 다산생가 뒷동산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아마도 다산은 이 곳 정자에서 고향생각을 많이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산초당의 사랑채격인 동암에서는 다산이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건물은 다산초당과 같은 시기에 복원한 건물이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6. 강진 백련사, 다산초당과 함께 있는 고려말 백련결사 운동의 중심지


다산초당에서 강진 백련사로 걸어가는 길에 조성된 동백나무 숲. 아마도 다산선생이 이 곳에 있을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강진 백련사는 강진만을 굽어보고 있는 사찰로 고려시대 무인집권기 및 대몽항쟁기에 불교개혁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이끌었던 사찰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과 인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백련사는 백련결사운동을 이끌었던 고려시대의 사찰이 계속 이어져 온 것은 아니고,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왜구의 침입으로 폐사되었다가 세종때 재건되었다고 한다. 백련결사운동이란 고려시대 문벌과 결탁한 보수적인 교종세력에 맞서서 민중에 기반한 실천적인 불교를 표방했다고 한다. 당시 지눌이 주도한 선종 중심의 조계종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개혁운동이었다한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에 다산초당에서 가까운 이 곳 백련사를 자주 들러 차를 마시고 백련사 주지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하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사찰이다. 이 곳 백련사 경내에 올라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면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강진 백련사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7. 녹우당, 다산 선생의 외가인 해남 윤씨 고택 (고산 윤선도 선생 유적지)


해남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살았던 고택으로 그의 고조부인 어초은 윤효정이 이 곳에 터를 잡으면서 지은 건물이다. 녹우당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솟을대문이 정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고산 사당이 있는 동문쪽으로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많은 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8. 남양주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다산 유적지 뒷동산에 마련된 선생의 묘소. 지금은 팔당댐으로 막힌 호수같은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다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9. 남양주 다산유적지 주변 팔당호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에서 조금 하류쪽 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팔당댐으로 가로막힌 호수로 인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팔당호가 없었더라도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1762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에서 태어난 후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1776년에 승지 흥화보(興和輔)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4남 2녀를 잃었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李瀷, 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결혼하던 해에 부친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6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났다.

1789년(정조 13)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시 해미면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31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鐵身)·이승훈(李承薰)·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말년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설에는 신유박해 때 배교(背敎)한 것을 뉘우치고 고향에 돌아가 신앙생활을 했다고도 한다.[출처 필요]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평가
정약용은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南人學派)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暗行御史)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문견(聞見)과 경력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모두 다산학(茶山學)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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